[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노태우 前대통령 ③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노태우 前대통령 ③
  • 관리자
  • 승인 2006.08.3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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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한 가정, 올림픽 성공 때 가장 즐거웠다”

본지는 우리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대개 장수하는 데 주목하여 은퇴한 노인으로서 겪는 일상의 작은 행복과 세월의 무상함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지면을 마련했습니다. 공과 과가 있겠으나 어차피 전직 대통령들은 우리 역사입니다.
본지는 정치적 평가나 정파적 편향성을 지양하고 전직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적인 관심사와 삶의 즐거움, 건강생활, 원로로서의 자리 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지는 나라와 민족에게 불의한 일이나 좋지 않은 역사에 대한 평가와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획시리즈로 미뤄두고, 기왕의 기획시리즈를 계속하며 ①이승만 ②윤보선 ③박정희 ④전두환 전 대통령에 이어 다섯 번째로 노태우 전 대통령 편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백세시대 독자 여러분의 ‘건강 노년·문화 노년’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획 취재팀〉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나라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성공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제5공화국 이후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선거에 의해서 별 문제 없이 5년 단임으로 대통령을 교체하고 있다. 정치나 사회적으로 안정을 구가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대통령 임기가 너무 짧아 불편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정도다. 장기집권의 폐해를 경계하던 단임제를 연임제로 바꿀지 말 지를 생각해보는 시대가 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5년 단임제 헌법 하에서 당선된 첫 대통령. 대통령 재임 5년이 짧았을까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성과에 대한 자평은 5년 단임도 짧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중심 국가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전제한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가 추구해 온 정신적인 지표들은 다른 국가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위에 있는 것들입니다”라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지속해 나간다면 국력이나 정신력에서 다른 민족보다 앞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재임 때의 성과를 “올림픽을 통해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국민 대다수가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경제·복지 정책을 폈습니다”라면서 “북방정책을 통해 외교관계를 맺은 중국과 소련이 이제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역상대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북한이 아직도 폐쇄적인 자세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인데 이 역시 국제정세의 전개에 따라 개선되리라고 봅니다.”

 

 

일생 동안 어떤 기쁨을 맛보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답하는 자리에서도 노태우 대통령은 “내 인생에 많은 기쁨을 맛보았지만 대표적인 것을 들라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을 때이고, 공인으로서는 서울 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결실을 보았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여파가 계속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5년 단임을 한 첫 대통령으로서 재임 기간이 짧다는 지적은 없다.


여기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기뻤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접살림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좌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보다 더 기뻤을까  이것은 물론 어리석은 물음이다.

 

어떻게 그 둘을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고 계량할 수 있겠는가. 노태우 대통령의 이미지가 가정적이라는 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 것이 대통령이 된 것보다 더 기뻐할 수 있겠구나 싶기는 하다.

 

육군중위 봉급으로 살림 빠듯


노태우 대통령의 전기에 따르면, 김옥숙 여사에 대해 “처음 살림을 차릴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고생 다하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은 아내였다”고 한다.

 

신혼살림을 차린 것은 중위 때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 용산구 청파동 산동네 어느 집 문간방에 세를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수돗물 혜택도 받지 못하는 고지대여서 물도 한 지게에 얼마씩 돈을 주고 사 먹어야 했다. 

 

당시 육군 중위의 봉급으로는 한 달을 살아가기가 빠듯했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맞춰 살아가는 것이 한국 군인들과 빈한한 보통 사람들이 사는 방식. 육사출신 남편에 최고학부 교육을 받은 김옥숙 새댁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김옥숙 여사는 청파동 산동네에서 알뜰한 살림꾼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가족애가 강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라며 “아내와는 육사생도 시절에 만나 연애 끝에 결혼해서인지 50년 이상 변함없이 서로를 아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직에서 퇴임하기 직전인 1993년 2월 20일자로 발행한 전기 「노태우 대통령전」을 보면 그가 젊은 군인시절 얼마나 가정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원래 노 중령은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화를 낸 적도 없고 불평을 해본 적도 없었으며 자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외출할 때면 언제나 부인과 동반하기를 좋아하고 집에 오면 늘 유쾌해지려고 애썼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자는 아이들을 토닥거려주고 이른 아침이면 남매를 불러 양쪽 팔에 끌어안고 학교 얘기와 친구들 얘기를 하게 했다.”


자제들이 성장한 뒤에도 그런 식의 대화는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6·29선언을 하기로 결심하던 때에도 당시 대학생이던 아들 재헌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통령 시절은 물론이고 퇴임 후인 지금까지도 어렸을 때처럼 자제들을 챙기고 대화한다.

 

아들 재헌씨가 홍콩에 있고 딸 소영씨도 출가외인이 되어 요즘은 자주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과 휴대전화 같은 통신 강국의 초석을 놓았던 가정적인 전직 대통령이 가만히 앉아 외로워할 리 없다. 선진 아이티 기술문명을 이용하여 곁에 있는 듯이 대화하고 챙기리라는 것이다.


가정적이라는 점은 거칠고 외향적인 값싼 남성 우월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약점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특히 30년쯤 전 군 장교가 가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에 따라 오해의 소지도 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직업군인, 그것도 장교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훈련이다, 비상이다 하여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비일비재하여 미안한 마음에 집에 들어가면 더욱 가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3차례 올림픽 10위권 안에 들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자기 자신과 가정을 다스린 뒤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 노태우 대통령 전기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세 차례의 올림픽에서 한국은 계속해서 10위 이내에 들었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 종합성적 10위, 1988년 서울올림픽 때 4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7위 등 좋은 성적을 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은 동서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올림픽으로 세계사에 기록되고 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쪽에서 불참하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불참하여 올림픽이 반쪽으로 치러졌으나 서울 올림픽에서 하나가 됐던 것이다. 당시 서울 올림픽 주제가는 그 점을 상징하듯이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였다.


이런 성과가 따뜻한 가족애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화목한 가정, 부부간의 지극한 사랑이 노후에도 건강하고 백수 이상 장수하는 비결이 된다는 것은 이제 과학적으로 입증할 필요도 없는 빤한 상식이다.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을 역임한 사람이라면 오죽하겠는가.


군인출신 답지 않은 또 다른 일면은 노태우 대통령이 예술적 감성이 발달해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큐 143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던 만큼 스포츠는 물론이고 음악, 미술 문학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것이다.


문학은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던 젊은 시절 애틋하게 노태우 청년의 심금을 울렸다. 그런 문학적 소양은 노태우정권 출범과 동시에 이어령씨를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문화 전반은 물론이고 문학예술 분야 정책에 대대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고 현대문학과 같은 문예지에 서면 인터뷰를 하여 문학청년이었던 때를 회상하기도 했다.


폄하하기로 작심을 하자면 군 출신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정책적으로 배려했던 결과가 아니냐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이 그만큼 문민화가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5공화국 출범과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아니라면 장군으로 퇴역한 뒤 7년여 동안 민간인 신분이었으므로 군사정권이라는 악평을 들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물론 명실상부한 문민정부는 후일 ‘3당 합당’이라는 정계 개편을 통해 정권 재창출을 이룩하며 달성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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