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21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21
  • 관리자
  • 승인 2009.09.25 14:38
  • 호수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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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노인일자리사업 전개
복지부와 전국 시군구지회에 ‘노인능력은행’ 설치
효창공원 내 신광중 도서관에 서울시연합회 입주


1980년 취임한 박영수(朴英秀) 서울시장은 경로당 프로그램 활성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1981년 4월 초순, 서울시 노인담당 계장이 한국노인문제연구소로 필자를 찾아왔다. “시장이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계획을 세워보라고 지시해 참고자료를 구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에게 일본의 인재은행(人材銀行) 프로그램, 영국의 노인공동작업장(Sheltered workshop) 등 해외의 노인일자리 프로그램을 설명해 주고, 관련 자료를 복사해 건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영수 시장과 자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다.

박 시장은 필자에게 서울시가 경로당 노인에게 일자리제공 사업을 개발하려고 하니 많이 도와달라고 했다. 당시 서울시는 시내 몇 곳에 이미 노인취업알선센터를 시범운영하고 있었다. 다음날 이규동 회장에게 서울시장이 노인일자리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했다. 이규동 회장은 좋은 생각이라며 노인회가 앞장서 사업을 추진해 보자고 했다.

1981년 5월 하순, 대한노인회는 복지부와 서울시 노인복지담당 과장 등을 초청해 노인취업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간담회를 가졌고, 그 계기로 보건복지부는 대한노인회 산하 전국 시도연합회와 시군구지회에 노인취업을 알선하기 위한 ‘노인능력은행’을 설치하도록 했다.

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시군구지회에 대해서는 소요경비 일부를 보조해 주는 제도를 실시했다. 당시 노인취업과 관련해 취했던 조치들은 전시효과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정부가 노인일자리사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큰 의의가 있었다.

현재 서울시연합회 건물은 과거 신광중학교가 학교도서실로 사용하기 위해 1960년대 말 건축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원 내에 그와 같은 건물이 들어설 수 없다는 법적해석이 내려져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자 학교법인이 서울시에 기부해 사건이 마무리됐다.

그 후 이 건물은 10여년간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였다. 그런데, 필자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이 건물을 사용하려고 서울시와 교섭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규동 회장에게 그 건물을 노인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서울시에 교섭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서울시가 김구선생기념사업회에 그 건물을 넘겨주는 방침이 굳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는 권력을 배경으로 밀어붙이는 대한노인회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는지 1981년 8월 23일 이 건물을 대한노인회가 사용하도록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대한노인회와 김구선생기념사업회는 이 건물 건으로 한동안 서먹서먹한 관계가 지속되기도 했다. 특히 필자는 이 건물이 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사용할 수 없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장본인이었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 건물은 그 후 서울시가 노인복지회관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마무리한 후 1983년 4월 대한노인회 중앙회가 그 사용권을 넘겨받아 1988년 말까지 그곳에서 주로 노인대학 운영, 가훈전시회 개최, 경로병원 운영, 노인솜씨자랑, 수공예품 전시장 등의 용도로 사용했다.

한때는 서울시가 이 건물을 노인종합복지관으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1990년 가을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를 이전시켰다. 이전까지 서울시연합회는 중앙회 1층에 입주해 있었다.

당시 중앙회 건물은 지금과 같은 3층 구조였는데, 1층은 서울시연합회, 2층은 중앙회, 3층은 한국노인문제연구소와 강당, 식당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규동 회장은 취임한지 14개월만인 1982년 5월 12일 회장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그가 좀 더 오래도록 회장직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다. 그가 회장직에 있어야 노인회가 회세를 확장함에 있어 권력기관의 협조를 얻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이규동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자신의 심복 몇 명을 노인회 직원으로 데려다 사무총장과 총무부장, 사업부장 등 요직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대한노인회의 명의를 이용해서 사복을 채우기 위한 이권운동에 지나칠 정도로 대담하게 개입했다.

그들은 지하철의 자동판매기사업권, 서울운동장 내의 이동판매사업 독점권, 한전의 고철매각 독점권, 가락시장의 점포이용권 등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권운동에 개입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회장 역시 경제계 거물급 이사들과의 접촉으로 하루 일과를 채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회장은 보통 오전 9시에 출근하는데 그보다 30분 전에 이미 비서실에는 언제나 경제계 인사들이 몇 명씩 떼 지어 회장의 출근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노인회는 찬조금을 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거액이 들어있는 수표 봉투를 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금전과 관련된 문제는 회장과 그의 심복들 몇 명 이외에는 누구도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필자는 수시로 회장과 접촉하는 입장이었지만 왜 노인회가 경제계 인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해야 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시 시중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대한노인회는 이권운동을 해서 많은 돈을 쓸어 담고 있다고 하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필자는 같은 건물에서 회장과 수시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노인회에서 개입하고 있다는 이권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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