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노태우 前 대통령 ④
[장수하는 한국의 대통령들] 노태우 前 대통령 ④
  • 관리자
  • 승인 2006.09.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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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되돌아보는 기쁨만큼 가장 오래 살 운세

노태우 전 대통령은 뚜렷한 특징도 별로 없고, ‘이것이다’라고 꺼내들 만한 대통령으로서의 업적도 얼른 떠오르지 않는 편에 속한다.

 

이것은 재임 중 이른바 ‘물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유약해 보이던 이미지와 연관이 있다. 시민의식이 성숙한 측면도 있으나 ‘6월 민주항쟁’과 노사분규 등의 과정에서 노 정권이 휘둘리기도 했다. 그래서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권위적 존재감이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약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은 노태우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힐만하다. 역설적으로 국가 최고 권력자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가 노 전 대통령 임기 5년을 지나면서 선진국형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민주정치의 요체인 ‘국민 주권’ 의식이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뚜렷해졌으니 그것이 결국은 큰 업적이라는 얘기다.


개혁의 결과가 당대에 바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재임 때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 국책사업이라면 퇴임 후에 완결되는 것이 좋다.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도 기뻐한 일이지만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도 결국 전임 정권에서 그것을 유치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의 존재감이 세인들에게 취약하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통사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움으로써 의도하지 않은 ‘상징조작’ 효과를 거둔 측면도 있으나 누구보다 실속을 챙긴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자신의 재임기간을 돌아보며 행복해 하는 지수만큼 건강하고 장수하기로 한다면 1등은 노태우 대통령이 맡아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나 우리 역사적으로 유독 영예로운 상황들이 그 때 많았다는 뜻이다.

민족사적으로 영예로운 시점의 대통령

북방정책의 성공은 그 중 가장 영예로운 순간일 것이다.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이데올로기 붕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결국 한국도 미국을 위시한 일종의 전승국 일원이었다.

 

전승국의 국가원수로서 국빈외교를 했다는 사실보다 영예로운 일이 또 있을까. 우리 역사에서 그런 지위에 있었던 국가원수는 일찍이 없었다.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던 때의 노태우 대통령의 태도를 어록을 통해 살펴보자.


“우리는 북방정책을 통해 반세기 가까이 막혔던 북방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습니다.”(1990년 제일교포 청년 야영대회에 보낸 말)


“평양으로 가는 길이 바로 열리지 않으면 모스크바와 북경으로 돌아서 평양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북방정책이 추진되면서 평양으로 가는 문의 빗장도 벗겨졌습니다.”(1992년 11월 「코리아타임즈」와의 인터뷰)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한 우리의 북방정책은 중국, 그리고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훌륭히 마무리됐습니다. 남북한 사이에도 기본합의서가 발효되어 반세기에 가까운 단절과 대립의 관계가 청산되고 공존공영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겨레의 평화적 통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이제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1993년 1월 신년사)


세인들이 모르거나 알면서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이에 노태우 대통령이 이런 영예를 누리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와 회담하고, 한때 동토의 땅이니 철의 장막이니 하던 적대국의 땅 모스크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 유엔총회에서 남북통일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현대는 총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영토확장의 개념도 그래서 옛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노태우대통령의 북방정책, 남북관계의 개선 노력은 전승국 지도자로서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전쟁 위험이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그 한쪽 당사자가 한국이다. 그런 긴장 속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국가경제발전 모델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주의권 사회와의 싸움에서 이긴 국가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본 지면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는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는 노태우 대통령의 좌우명을 다시 생각해보자. 2006년 시점에서 돌아볼 때 노태우 대통령은 게임에서 진 대통령이 아니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비교된다는 말도 있듯이, 지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늘 이기고 있었다. 국민여론에 휘둘린 물 같은 대통령 이미지로 기억되지만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거의 관철시켰다.

 

“여전히 북한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안타깝다”는 뜻을 밝힌 바도 있고 “언론에 섭섭할 때가 있다”고도 했으나,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정책이 다음 정권 혹은 다음다음 정권에서 실현되기도 했다.

북한 문제 해결 못한 아쉬움 커

남북문제의 경우는 노태우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뒷말이 없는 경우에 해당된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 후 유엔총회 연설을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이 제의한 ‘고려연방제안’도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어떠한 안을 내놓든, 북한이 고려연방제 안을 들고 나와도 우리는 진지하게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도 했다. 국제 사회는 소박하면서도 신축성 있는 노태우 대통령의 자세에 호감을 표시했다.

 

이 내용을 야당지도자가 이야기했다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북한을 외교적 파트너로 인정하고 연방제 안에 대해 협상할 용의가 있다 했어도 토를 다는 세력이 별로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은 노태우 대통령도 역점을 두고 추진했다. 1988년부터 지속적으로 주장했는데, SBS텔레비전 개국 특집 회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분단의 체제는 중간 단계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정상이 만나야 하나라도 올바른 것을 남북한을 위해서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신념 하에서 지금까지 쭉 정상회담 제의를 해왔습니다.”


물론 정상회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연형묵 정도의 북한 고위급 인사를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몇 년이 흘러 ‘6·15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나, 일각에서는 그 절차와 방법론적인 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과 같이 존재감이 없는 대통령에 의해 좀더 일찍 정상회담이 이루어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당 합당이라는 정계개편을 통해 민자당을 창당한 것도 노태우 대통령이 게임에서 진 것 같지만 이긴 경우에 속할 것 같다. 그 덕분에 정권 재창출도 이루어냈다.

 

물론 그렇게 재창출된 정권에 의해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창당했던 민자당은 이름을 바꾸며 영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제5공화국 출범 과정의 도덕성 시비도 재야 진보세력을 포함한 김영삼 대통령계 인사들과의 합당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겉으로 지거나, 물러 보이고, 늘 2인자 같지만 내면으로 이기고 강하게 존재하는 대통령이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우리 역사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전변하는 시기에 한국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영광을 누렸을 지도 모른다.


알아주든 말든 노태우 대통령 본인에게는 한없이 행복한 기억일 것이다. 위대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해도 위대한 대통령이 겪을 만한 상황에 처했었다.

 

어떤 대통령이라도 대표적인 업적을 꼽아보라면 하나나 둘에 불과한데, 기억할 것이 유난히 많으니 오래오래 늙지 않고 건강할 것 같다. 정치인들이 오래사는 이유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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