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문식 기자의 만만담] 지공거사 (地空居士)
[함문식 기자의 만만담] 지공거사 (地空居士)
  • 함문식 기자
  • 승인 2009.11.12 16:41
  • 호수 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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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들어 노인을 지칭하는 말로 ‘지공거사’가 쓰이고 있다. 무슨 득도의 경지에 이른 도인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의 줄임말이다. 세계적으로도 노인에게 이동권을 보장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전철 자유이용권을 발급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한국적 경로우대의 상징처럼 된 제도다.

지하철이 확장된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의 노년층은 제도가 시행된 80년대 중반보다 몇 배에 달하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용하는 노인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다. 수혜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회적 부담은 크게 늘어난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도시노인들만 혜택을 보게 되므로 형평성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고, 지하철 운영주체도 적자를 이유로 슬그머니 고령자 우대제도 폐지안을 내놨다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철회하기도 했다.

광고도 등장했다.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내용이다. 현재의 경로우대석에 젊은 사람들이 앉아 있고, 경로우대석이 아닌 넓은 자리에 노인들이 앉아 있는 공익광고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으로 더 이상 경로효친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점차 약화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지하철 등에서는 자리를 두고 노인들이 젊은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마땅히 양보해야 할 자리에 젊은이가 떡 하니 앉아 있는 것도 보기 싫은 일이지만, 경위를 살피지 않고 무조건 ‘네가 뭔데 내 자리에 앉아 있느냐’는 식의 호통도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보호받아야 할 임산부나 장애인이 그 자리에 앉기를 꺼려하는 것은 물론, 노인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

한 임산부는 몇몇 여성 노인들로 둘러싸여 “나는 애 낳고 밭일도 나갔었어. 애 가진 게 뭔 유세야?”라는 비아냥을 듣고는 공포감을 느껴 바로 지하철에서 내린 후 출산까지 다시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경로우대석에 앉아야 할 우선 순위를 두고 같은 노년층이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이를 보는 젊은 층은 노년을 ‘우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할 존재’쯤으로 취급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공거사’라는 말에는 아직까지 노년을 심하게 폄하하는 의미는 담겨있지 않지만, 앞으로 이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게 될 지는 노년층이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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