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 산책] 문 없는 문
[디카시 산책] 문 없는 문
  •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 승인 2024.04.29 13:44
  • 호수 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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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없는 문

들어갈 수 없는 문 앞에서 문을 찾아

오래 서성거린 적이 있다

저 혼자 무성하던 날들 다 보내고 나서야

애초에 문이 없었음을 알았다

첫사랑이 그랬다


경남 하동에는 산비탈에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녹차를 생산하는 곳이 많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하동을 지나다가 문득 차나무가 심어진 밭고랑을 찍으려고 들어간 집은 울도 담도 없었고 사람이 살지 않은 듯 고요했다. 뒷마당에 자그마한 차밭만 있었다. 분명 문인 것 같은데 문인 듯 아닌 듯 백화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안에서 열고 나와야 하는 문인지, 아예 처음부터 없는 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첫사랑처럼, 눈길 한 번 안 준 그 애 곁을 맴돌기만 하던 무성한 시간들이 저 혼자 꽃 피웠다가 다 지고 나서야 애초에 그곳에는 내가 열 수 있는 문이 없었음을 알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가끔씩 들춰보는 기억 저 밑바닥에 화석처럼 박혀있는 나의 첫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끝이 났다. 그토록 뜨겁던 여름날 같은. 

디카시·글 : 이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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