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8] 조선의 궁녀 “왕실 세숫물서부터 요강 시중까지…왕비 가마도 메”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8] 조선의 궁녀 “왕실 세숫물서부터 요강 시중까지…왕비 가마도 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5.13 14:51
  • 호수 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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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00명이 왕 내외, 대왕대비, 왕자와 공주 수발 

우두머리 궁녀는 ‘제조상궁’…재상도 함부로 안 해

노후에 궁에서 나와 절·암자 등지서 모여 살기도

음식을 담당하는 궁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
음식을 담당하는 궁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 ‘대장금’의 한 장면.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과거 청와대 직원은 450여명이었다. 조선의 궁녀는 이보다 더 많은 600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궁녀가 왕과 왕의 가족을 위해 존재했다. 도대체 경복궁 안에 그 많은 여자들이 어디서, 무슨 일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외부에선 궁녀를 나인이라고도 부르지만 그들 사이에는 엄격한 신분 차이가 있고, 역할에 따른 호칭도 각각 있다. 궁녀는 왕이 있는 대전 외에도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와 공주궁 그리고 후궁과 각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를 포함한다. 

성종 때 궁녀의 계층은 정5품부터 종9품까지다. 정5품 상궁직을 최고로 해 최하 4,5세의 어린 견습나인(아기나인)까지 있다. 궁궐의 의식주에 관련된 일을 하는 궁녀로는 지밀-침방-수방-세수간-생것방-소주방-세답방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격이 높은 이가 지밀나인이다. 지밀은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와 잠자리, 음식, 의복 등 모든 것을 시중한다. 내전의 물품 관리, 내시부, 내의원, 전선사(典選司)들과의 중요한 교섭을 담당한다. 궁녀 중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기 때문에 후일 왕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4,5세의 나이에 궁으로 데려와 7,8세 무렵부터 ‘동몽선습’, ‘소학’, ‘열녀전서’ 등을 가르친다.

◇연산군은 직접 미모 보고 뽑아

침방은 왕과 왕비의 옷을 비롯해 왕궁에서 소요되는 각종 의복을 제조하고, 수방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복식이나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이다. 이들이 지밀 다음으로 격이 높다. 세수간은 아침저녁 왕실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일을 한다. 요강의 시중과 수건 그릇 세척도 담당하고, 왕비가 궁내 나들이를 할 때에는 가마를 메는 일과 그 앞뒤에 서는 일을 수행한다. 생것방에서는 왕이 아침저녁 식사 외에 먹는 음료와 과자를 만들고, 소주방에선 아침저녁 식사와 잔치음식을 관장한다. 

궁녀 중 우두머리는 ‘제조상궁’(提調尙宮)이다. 제조상궁은 한 사람뿐이며, 학식과 영도력, 외모가 뛰어나야 한다. 재상도 제조상궁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려운 일을 부탁하기도 했다. 심지어 재상과 제조상궁이 의남매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그밖에 왕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어명을 받을 자세로 대기하는 특명상궁(지밀상궁)과 왕의 자녀 양육을 맡은 나인의 총책임자인 보모상궁,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는 시녀상궁, 궁녀들의 근태나 소행 등을 감시해 평가는 감찰상궁 등이 있었다.

상궁 중 왕의 승은(承恩)을 입으면 특별상궁이 된다. 승은은 왕의 손길이 닿은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후궁으로 오르지 못하면 승은상궁에 머문다. 수백의 궁녀 가운데 승은을 입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나머지 궁녀들은 외롭게 생을 마감해야 한다. 

궁녀는 어떤 이들이 될까. 궁녀의 선발은 내명부의 소관으로 각 처소에서 궁녀 선발이 이루어진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직접 선발하는 ‘친선’이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하루에 30명씩, 이틀간 60명을 경복궁 사정전에서 직접 심사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각 관청의 노비와 사족 서녀 중에 미모가 있어서 시녀가 되기에 합당한 50명을 뽑아 들여라. 내가 마땅히 따로 뽑을 것이다”라는 전교를 내렸다.

궁녀를 고를 때 우선 검토 대상은 가족이다. 후보자의 가족 중 전과나 중환자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가족 중 기생이 있으면 궁녀가 될 수 없었다. 다음으로 종친부나 의정부의 공노비는 될 수 없었다. 성균관의 공노비도 금지됐다. 

서류심사를 통해 본인과 가족에게 문제가 없다고 간주되면 상궁과 색장나인이 직접 됨됨이를 심사했다. 이 과정에서 숫처녀를 확인하는 방법이 지극히 원시적이다. 앵무새의 피를 후보자의 팔목에 묻혀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숫처녀이고 흘러내리면 숫처녀가 아니라고 판정했다. 

◇마지막 상궁 2001년 82세로 사망

효종 때 궁녀를 양인 중에서 선발하기도 했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양인들이 딸을 궁녀로 보내기 싫어 내수사의 궁녀 차출 수색을 피해 딸을 숨기거나 10세 전후의 딸을 조혼시키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궁녀 가운데 재테크의 귀재가 있었다. 상궁 박씨는 여러 차례 토지 매매를 해 부동산 재산을 축적했다. 재산을 양손자 박상간에게 물려줬고 양손자가 토지매매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궁 박씨 외에도 재산을 잘 모아두고 잘 굴려서 노후에 어려움이 없었던 궁녀들이 있었다. 돈 많은 상궁들은 기생까지 불러다 꽃놀이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단 궁녀는 은퇴 후에도 친자식을 두는 건 불가능했지만 일부 궁녀들은 양가족이라도 들여서 대를 잇고 재산을 물려주기도 했다. 

궁녀는 환갑에 이르면 삶을 정리하는 시기라고 단축근무를 했다. 궁녀는 죽을 때까지 왕의 여자지만 여러 이유로 반드시 궁을 떠나야 했다. 대궐 안에서는 왕의 직계혈족 이외에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 궁녀가 중병에 걸렸을 경우 가족이 친정으로 데려갔다. 궁녀가 죽었을 경우 궁궐에서 제수용품을 내리고 3년 동안 쌀과 같은 봉급을 주었다. 

궁녀는 소속된 주인이 사망했을 때 궁궐을 나가야 한다. 한 달 동안 의례를 한 뒤 신위나 종묘가 모셔지면 떠났고 3년간 상복을 입었다. 

노후를 돌봐줄 가족이 있으면 귀가해서 살 수 있었고 여의치 않으면 은퇴한 궁녀들만 모여 사는 절이나 암자 등에서 말년을 보냈다.

조선, 대한제국 시절의 궁녀 중 마지막 생존자는 15세에 창덕궁 침방나인으로 들어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년)를 모셨던 성옥염 상궁으로 2001년 5월 4일, 8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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