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9] 조선을 도운 명 황제 ‘만력제’ “임진왜란 사흘 만에 원군 파병…전후복구에 쌀 지원도”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69] 조선을 도운 명 황제 ‘만력제’ “임진왜란 사흘 만에 원군 파병…전후복구에 쌀 지원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5.20 14:04
  • 호수 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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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함락되면 다음은 명 차례…두려워서인 듯 

송시열 등 사대부들 충성…괴산에 사당 세우기도

30년 정사 돌보지 않아 중국에선 ‘暗君’소리 들어

명나라 최장수 황제 만력제. 그러나 재위 기간 48년 중 30년 간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명나라 최장수 황제 만력제. 그러나 재위 기간 48년 중 30년 간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임진왜란(1592~1598년) 당시 이순신 장군 말고도 조선을 위기에서 구해준 고마운 이가 있다. 중국 명나라 황제 만력제(萬曆帝·1563~1620년)이다. 만력제는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바로 원군을 파병했고, 전쟁 복구 과정도 도운 인물이다.   

조선은 한양마저 위태롭게 되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 무렵 명도 황제(만력제)가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는 등 사정이 썩 좋지 않아 신하들은 반대했다. 하지만 만력제는 사흘 만에 파병을 결정한다. 

만력제는 군사 5000명과 은화 2만냥을 선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이 굶는다는 말을 듣고는 명나라 최대 곡창 중 하나인 산둥성의 쌀 100만석을 은화 100만냥을 주고 구입해 조선에 보냈다. 이는 조선의 쌀 수확량 10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만력제는 이후 정유재란에도 20만명의 군사를 조선에 파병했고, 그에 대한 비용으로 은화 500만냥을 마련해줬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두 차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전후복구를 위해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재산)에서 은화 200만냥을 지원하기도 했다.

◇조선 도와 ‘조선천자’ 말 듣기도

만력제는 이처럼 아낌없이 조선을 도와줘 ‘조선천자’, ‘고려천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만력제가 조선을 도운 건 추측하건대 조선이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다음은 명나라 차례가 될 것을 두려워해서였을 것이다. 야사에선 이런 해석도 있다. 만력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관우가 나타나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의 왕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라며 장비(선조)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만력제의 지원을 ‘재조지은’(再造之恩·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이라면서 명에 무한 충성을 바쳤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충북 괴산군 화양계곡의 만동묘(萬東廟)이다. 숙종 30년(1704년)에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만력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만동묘는 공자의 ‘만절필동’에서 유래된 말로, 황하가 만 번 굽이쳐도 동해로 흐른다는 뜻이다. 명이 망했어도 조선이 명의 원군으로 나라를 건졌다는 글귀가 암벽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 중 하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한다.

만력제는 명의 제13대 황제로 묘호(廟號)는 신종이고, 이름은 주익균(朱翊鈞)이다. 재위 때 ‘만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만력제라고 부른다. 1563년 9월 4일 융경제(隆慶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궁녀 출신의 귀비 이씨이다. 위로 두 명의 형이 일찍 죽어 6세 때 황태자가 됐다. 융경제가 황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죽자 10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스승인 대학사 장거정(1525~ 1582년)이 정무를 대신 맡았다. 장거정은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명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부역과 조세를 하나로 통합(일조)해 현실에 맞게 세금을 거둬들였고, 은으로 납부하도록 해 황실은 은으로 넘쳐났다. 조선에 많은 은을 보낼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이다.

그러나 후에는 이 조세법 때문에 명이 망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일조편법은 일종의 인두세로, 사람의 머리수만큼 세금을 부과하는 것인데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더욱이 농민은 은을 구하지 못해 납부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호적에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는 이가 늘었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군역을 지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곧 국방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문화대혁명 때 유골 소각돼  

만력제는 48년간 재위해 명의 최장수 황제로, 초기엔 정상적인 군주였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으면서 돌변했다. 엄격하고 청빈하기만 했던 장거정이 알고 보니 부정축재를 한 탐관오리였음이 밝혀지면서 인간에 대한 배신과 원망, 좌절감에 빠져 정치에 뜻을 잃은 것이다. 이후 30년 동안 어떤 상소문에도, 보고문에도 결제를 하지 않았다. 중간 관리자는 임기 동안 만력제의 얼굴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만력제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 축재에만 몰두했다. 환관 등을 ‘광세사’(鑛税使)로 파견해 백성을 힘들게 했다. 광세사는 명의 대표적인 악정 중 하나였다. 광세사는 지하에 광맥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채굴 목적으로 그 지역의 백성을 모두 몰아냈다. 채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근의 상인들에게 도광의 책임을 물어 배상을 강요했다. 여기에 황태자의 책봉 문제를 둘러싼 내각과 황제의 대립은 정치 불안을 낳았고, 환관 세력이 발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만력제는 ‘발배의 난’, ‘양응룡의 난’, 임진왜란 등 ‘만력삼정’(萬曆三征)이라 불리는 세 곳에 대규모 군사를 파견해 재정이 위태로워졌고 국력도 소진됐다.  결국 명은 내부적으로 정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농민 반란과 누루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침략에 시달리다 1644년에 멸망했다. 

만력제는 1620년 8월 18일에 사망해 정릉에 안장됐다. 정릉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에 의해 파헤쳐졌고, 만력제의 유골이 소각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비만에다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을 앓아 움직이기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 만력제는 은인이지만 중국인들로선 역사상 최악의 ‘암군’(暗君)이었다. 암군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어 국가에 큰 해악을 끼친 임금을 일컫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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