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70] 황룡사 9층 목탑, 어떻게 세워 졌나 “신라에 기술자 없어 백제인 도공 데려와 탑 쌓아”
[인문학 여행 역사의 길을 걷다 70] 황룡사 9층 목탑, 어떻게 세워 졌나 “신라에 기술자 없어 백제인 도공 데려와 탑 쌓아”
  • 오현주 기자
  • 승인 2024.06.10 13:55
  • 호수 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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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법사가 고구려·백제 등 침략으로부터 신라 보호하려

645년 선덕여왕 때 완공… 66m 높이로 법주사 팔상전의 3배

고려 때 몽골에 의해 절과 함께 소실…벼락만 5차례 맞아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있는 황룡사 9층탑. 1/10로 축소했다.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있는 황룡사 9층탑. 1/10로 축소했다.

[백세시대=오현주 기자] ‘신라 3보’(三寶)가 있었다. 황룡사의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 진평왕 천사옥대(天賜玉帶), 황룡사 9층목탑 등이다. 이 세 가지는 신라 수호의 상징적 보물로 예술·건축학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륙삼존불상은 황룡사 중금당에 봉안된 거대한 불상으로 청동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했다. 높이가 5.7m 가량이다. 천사옥대는 579년 진평왕이 즉위할 때 하늘로부터 받은 허리띠이다. 

황룡사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로 현재는 터만 남았다. 황룡사지는 사적 제5호이다. 절터로 봐서 경내의 넓이가 약 2만평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국가적인 행사나 우환이 있을 때 황룡사 주지를 궁에 청하여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했다. 백고좌(百高座) 법회는 오늘날도 열리는 것으로 ‘백개의 높은 법석’이라는 뜻이다. 551년 신라 진흥왕 때 혜량 스님이 나라의 평안을 빌고 백성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100명의 법사를 모시고 기도했던 것에서 유래됐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년)에 터를 파기 시작해 16년만인 569년에 완공됐다. 1238년(고려 고종)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황룡사보다 더 많이 알려진 건축물이 황룡사 9층 목탑이다. 높이가 무려 66.7m 되는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21m)의 3배 높이다, 현재는 초석만 남아 있다.

◇여자가 왕이라 위엄이 없어 

이 거대한 목탑은 어떻게 세워졌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어 흥미롭다. 삼국유사는 고려 승려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시대의 역사서이다.

신라의 승려 자장법사(590~658년)가 636년(선덕왕 5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중국의 태화지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나타나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느냐”고 물었다. 

자장법사가 “보리(菩提·불교 최고의 이상인 불타 정각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령한 사람이 자장법사에게 절을 하고 “너희 나라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자장법사가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

신령한 사람이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이어 “황룡사의 호법룡이 바로 나의 큰아들인데 범왕의 명령을 받고 가서 절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본국에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를 열고 죄인을 풀어주면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 서울 남쪽 언덕에 정사를 하나 짓고 함께 나의 복을 빌어주면 나 역시 덕을 갚아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643년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내려준 불경, 불상, 가사, 폐백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탑을 세울 것을 권했다. 선덕여왕(?~647년·신라 27대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자 신하들이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을 데려와야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선덕여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阿非知)라는 이가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 용춘 등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아비지라는 이름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고어인 '아비'와,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접미사인 '지'의 합성어로, 대략 '큰 어르신'이란 뜻이다

◇탑 기둥 서는 날 백제 멸망 꿈

처음 탑의 기둥을 세우는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의 꿈을 꿨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캄캄해지는 가운데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더니 모두 없어졌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645년(선덕왕 19년)의 일이다.

탑이 세워진 이후 신령한 사람의 예언대로 신라는 삼국 통일을 했고 천지가 태평했다. 

해동 명헌 안홍이 지은 ‘동도성립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황룡사 9층탑의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억누른다.”

9개의 층마다 주변국가의 이름을 붙여 그들의 침략을 막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탑이 워낙 높아 자연적인 재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국사’와 ‘사중고기’의 기록이다.

“32대 효소왕이 즉위한 698년 6월에 벼락을 맞았다. 720년 성덕왕 때 다시 지었고, 868년(경문왕)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아 같은 시대에 세 번째로 다시 지었다. 953년(고령 광종)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 13년 신유년에 네 번째로 다시 지었다. 정종 2년 을해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1064년(문종)에 다섯 번째로 다시 지었다. 1095년 현종 말년 을해년에 다섯 번째로 벼락을 맞아 1096년(숙종 병자년)에 여섯 번째로 다시 지었으며, 1238년 고종 16년 무술년 겨울에 몽골의 침입으로 탑과 절, 장륙존상, 전각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황룡사 9층탑이 지금껏 잘 보존됐더라면 우리나라 고대 건축기술을 세계에 자랑하는 건축물로서 일찌감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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