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33
박재간, 대한노인회를 회고하다 33
  • 관리자
  • 승인 2009.12.19 14:56
  • 호수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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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현 회장, 3선 위해 ‘평생동지론’ 제창
백창현 회장은 재선된 후반기 3년 동안에도 노인회 발전 또는 노인권익신장을 위해 별반 고민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기관지 ‘노인생활’을 통한 자신의 홍보, 차기회장 경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전국의 대의원들과의 친분 유지에만 관심을 두는 듯했다.

그가 회장으로 재임한 후반기 3년간 중앙회의 살림은 대부분 황인한 사무총장과 이재수 운영국장 책임 아래 수행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인한 사무총장은 보건복지부와의 관계, 운영비 조달을 위한 섭외활동, 지방조직의 관리 등 회무처리 전반에 걸쳐 매우 꼼꼼하게 일했다. 그는 회장의 부족한 점을 메우기 위해 무척 고생한 사무총장으로 기록될 수 있다.

이 기간에도 대한노인회는 나름대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년간 조흥은행의 후원을 받아 매년 전국노인게이트볼대회를 개최했고, 1995년 5월에는 ‘노인복지상조회의 운영준칙’을 제정해 산하조직 상조회의 금전사고를 줄이는데 기여했다.

1996년까지만해도 전국 16개소에 불과했던 노인취업알선센터는 보건복지부의 예산증액을 통해 1998년부터 70개소로 확대시켰다. 1980년대에는 정부보조금을 받아 연례행사로 실시하던 시군구지회장 및 사무국장 연수교육이 정부보조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황인한 총장의 노력으로 차질 없이 진행됐다.

그밖에 전국 시군구지회가 노인자원봉사활동을 강화하도록 했고, 경로당 프로그램 활성화 및 회원 증가운동을 전개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백창현 회장의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는 각 지방자치단체로 하여금 노인복지기금조례를 제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일이다. 서울시의회 복지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백 회장은 노인복지기금조성에 관한 조례 제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조례 제정으로 서울시는 노인복지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이 기금의 이자가 관내 노인 서비스프로그램 운영에 보탬이 됐다. 백창현 회장은 각 시도연합회와 시군구지회장에게 해당지역 자치단체 의회도 서울시의회처럼 동일한 조례를 제정하도록 교섭하라는 공문을 시달했다. 백창현 회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2000년 초까지 전국 시도 및 시군구 의회 중 80% 이상이 노인복지기금조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에 과거 대한노인회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유난히도 많이 세상을 떠났다. 육영수 여사 송덕비 건립에 앞장섰던 장봉옥 여사, 1970년대 말 중앙회 회장대행을 맡았던 이병호 옹, 이규동 회장 당시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하두철 박사, 서울시연합회장을 역임한 윤재욱 전 의원, 1970년대초 중앙회장을 역임한 김공평 옹, 경북연합회장 역임한 엄창섭 및 이우백 옹, 전남연합회장을 역임한 김용우 옹 등이 이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

백창현 회장은 1997년 2월 개최된 총회에서 1차 중임하는데 성공했으므로 2000년 2월까지는 회장직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정관상 3선에 도전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백 회장은 정관을 개정해서라도 계속 회장직에 머물기 위해 무리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99년에 접어들면서 돌연 ‘평생동지론’을 제창했다. 중앙회장을 비롯해 전국 시도연합회장과 시군구지회장이 계속 회장직에 남아 평생 대한노인회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동지가 되자는 것이 평생동지론이었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평생동지론’을 정당화시키려는 백 회장의 논리였다.

백창현 회장은 임기만료 4개월을 앞둔 1999년 10월초 ‘각급회 회장은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한 정관 조항을 삭제하는 개정안을 작성, 시도연합회장 및 시군구지회장에게 발송해 서면결의로 가결시켰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정관 개정안을 승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장기집권은 노인회 발전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주무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임원선출을 위한 총회 1개월을 앞두고 보건복지부는 돌연 종전의 입장을 번복하고 정관을 승인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백창현 회장이 재력을 배경으로 정치권을 동원, 그 일을 해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정관이 개정됨으로써 백창현 회장은 2000년 2월 정기총회에서 3선에 도전할 길이 열린 셈이다.

필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회장이 장기 집권하는 관례가 만들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제 아무리 유능한 회장이라도 한 사람이 장기 집권하는 것은 노인회의 발전을 위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평소의 신념이기도 했다.

1988년 이 호 회장이 3선에 도전하려고 했을 때에도 필자는 그의 재출마를 적극 저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그와 좋게 지내던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필자는 이번에는 기어코 백창현 회장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생각으로 국가원로급 인사 몇 분을 만나 대한노인회장으로 출마할 것을 권고해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노인회가 자신을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한다면 노인사회를 위해 봉사해 볼 수도 있으나 백창현 회장과 경선하는 상황에서는 출마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참에 필자는 우연히도 안춘생 옹과 인연을 맺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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