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수월한 노년을 위한 ‘노인 십계(十戒)’
[금요칼럼] 수월한 노년을 위한 ‘노인 십계(十戒)’
  • 관리자
  • 승인 2006.09.0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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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사회와 가정에서 이제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존경은커녕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됐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노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노년을 평온하고 세련되게 그리고 부러움을 사면서 보내는 사람도 많다. 노인 스스로가 어떤 생활자세를 가지고 처신 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노년을 수월하게 보내기 위한 열 가지 마음가짐을 적어 본다.


첫째,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나이 많다고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남이 뭔가를 해주기 바라고 누구에게 기대보려고 하는 자세는 젊을 때는 유아성(幼兒性)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나이 들어서는 노화(老化)가 상당히 진행됐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정부의 복지 정책상 노인은 대우받을 권리가 인정된다. 그러나 제 몫을 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그렇지 않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병들어 눕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이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폐를 끼치지 않는 생활 태도다.

 

이제 곧 인구 4명 중 한 명이 노인인 고령사회로 접어든다. 그때가 되면 노인이라고 특별대우를 받기 어려워진다.


둘째,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하자.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점점 좁아진다. 그것을 자연의 순리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나이 들어서도 자신의 최전성기 생활방식을 계속 유지하려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은 보기에도 측은하다.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력으로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려는 것은 무리일 뿐이다. 무리는 낭패를 부른다.


셋째, 자신이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고독, 가난, 병고(病苦) 등 자신의 괴로움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이 들면 사람은 자기중심이 되기 쉽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인간의 공통운명 그리고 총괄적 사회상황에 비추어 보려 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이라는 독선적 사고방식이 ‘나의 불행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불평으로 이어진다. 고독과 병고는 이 세상 모든 노인들에게 공통된 운명이며 가장 큰 고통이다. 행복과 불행은 다른 누구와 비교해서 산출해내는 방정식이 아니다. 각자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넷째, 자서전(自敍傳)을 쓰지 마라.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고 여기고 자서전을 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하게 보이는 인간의 인생도 그 나름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생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해야 하는 이유다.

 

유명 호텔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 초청장이 한 달에도 몇 장씩 날아온다. 말이 초청장이지 그 때마다 2~3만원씩 돈을 내게 하고 시간을 빼앗는 일은 폐를 끼치는 일이다. 자신의 사랑, 선의 같은 것을 죽은 후에 남기고 싶다면 재산의 사회 환원이나 장기기증 같은 숭고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업적이 사회적으로 공인될 만큼 훌륭하다면 그것은 사후에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기록해 줄 것이다. 위인 전기를 써서 떼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다섯째, 자식에게 노후를 의지할 생각은 당장 바꿔라. 자식은 노후보험이 아니다. 자식에게 기대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자식의 일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존귀하지만 보답을 전제로 하는 경우는 이기적 타산 행위가 된다. 어떤 어머니는 “얘야 어머니는 이렇게 고생해서 너를 키우는데 크거든 엄마 잘 모셔야 돼, 알겠어 ” 하고 말끝마다 강조한다. 이런 어머니는 자식에게 투자를 하고 나중에 돌려받으려는 장사꾼과 크게 다름없다. 부모자식 간은 채권채무관계가 아니다.


여섯째, 무시당한다고 화내지 마라. 확실히 ‘늙은이’에 대한 태도가 나쁜 사람이 많은 시대다. 늙은이 가운데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나무라고 화를 내며 고치려 드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존경심은 결코 폭력적인 힘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귀도 멀고 눈도 멀고 운동능력도 상실한 노인 가운데도 남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위엄을 갖춘 경우가 있다. 존경은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스스로 노력하고 모범을 보여 상대를 승복시키는 그런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일곱째, 늙은이들은 단체 행동 때 신중하자. 요즘 지하철을 타보면 원기 있는 노인들이 그룹을 지어 다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탈 때 내리는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전철 속으로 마구 우르르 돌진하고 나이 들었으니 좌석을 양보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린다.

 

또 귀가 먹어서 그런지 고성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예사다. 전철 속에서 소란을 떠는 것은 초등학생이라도 안 될 일인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들에게는 더더욱 봐줄 수 없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젊은이들이 볼 때는 공해(公害)보다 더한 노해(老害)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여덟째, 인생을 한편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행복한 인생도 불행한 인생도 ‘일장춘몽’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깨어났을 때(죽음을 맞이할 때)를 걱정하지 말자. 인간의 행복감의 총량은 엇비슷하다. 아무리 좋게 보이는 사람도 결코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어떠한 불행 속에서도 여러 가지 구원의 길은 있기 마련이다.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조물주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죽음에 의해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되고 먼저 간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아홉째, 물건을 줄여 나가라. 돌아가신 부모의 옷가지나 일기장, 앨범, 기념패 등 유물의 처리문제로 골치를 앓는 자식들을 흔히 본다. 좁은 생활공간을 차지하고 쓸모도 없는 고물들 때문에 불편이 이만저만 한 게 아니다.

 

우리 몸의 세포처럼 낡은 것은 새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늙은이에게는 귀중한 것이라도 자식들 입장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 많다. 재산도 많이 남겨 놓으면 나중에 집안싸움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남기는 것이 최대의 자식 공양이다.


열 번째, 노년의 최고 선행은 화해(和解)하는 일이다. 화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이 들어 완고해진 노인에게는 더욱 힘들다. 오래 살다 보면 친구, 이웃, 친척 그리고 직장 상사나 동료들과 본의든 아니든 척을 지는 일이 없을 수 없다.

 

어쩌다 한을 품게 된 사람이라도 이쪽이 노인이라면 그리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다면 관계 개선이 가능할 것이다. 노인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고, 현재 증오의 대상이라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상대가 알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둔 암 환자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 며칠 동안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들과 화해하는 일이다.

금창태 시사저널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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