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 (老手別曲) 7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 (老手別曲) 7
  • 관리자
  • 승인 2010.02.20 12:54
  • 호수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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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 (7)

병원을 나서면서 황씨는 비칠거리는 걸음을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아잉은 두 세 걸음 뒤를 따라 걷다가 황급히 황씨의 팔을 붙잡았다.

황씨는 거칠게 팔을 잡아 뺐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두 사람은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가까운 병원을 갈 수는 없었다. 택시로 두 시간이나 걸리는 큰 도시로 나가 진찰을 받은 결과는 황씨의 불안한 예감대로였다.

아잉은 소리도 없는 울음을 삼키면서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축하합니다. 삼개월이네요. 친정아버지는 아니실테고…. 어떻게 며느리를 데리고 오실 생각을 다 했습니까? 영 신세대 시아버님이시네요.”

속도 모르는 젊은 의사는 빙글빙글 웃으며 농을 던졌다.

‘삼개월이라…. 그러면 우리나라로 오기 바로 전이었겠구먼.’

황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턱하니 다른 놈의 씨를 배 가지고 온 처자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전통적인 관념이라면 당장 멍석말이를 해서 다시 쫓아 보내는 것이 마땅한 처우일 터였다. 그러나 황씨는 자신이 없었다. 아잉을 보내고 다시 홀로 휑한 집을 지키며 살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늙음’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적막함이었다. 온종일 누구와 말 한번 섞지 않는 하루가 지나면, 저녁쯤에는 입에서 군내가 났다. 화초를 가꿔보기도 하고, 텃밭에 매달려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일해도 봤지만, 저녁 어스름 집으로 들어서면 훅 끼치는 어둠의 냄새가 몸서리나게 싫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그 느낌은 죽을 때까지 눌어붙을 요량인 듯 좀체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잉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다시 그 끔찍한 ‘어둠’을 매일 저녁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잉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저녁에 대문을 들어서면 고소하게 풍기는 밥 냄새와 함께, 불 켜진 창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씨는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물론, 아잉이 아니라도 적당한 과수댁을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짝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 나이 환갑이면 새파란 청춘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줄줄이 소개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황씨는 적잖은 실망만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대체로 황씨 나이에 이른 과수댁들은 무슨 의심이 그리도 많은 지, 만남을 가지기 이전부터 이리저리 재는 품이 영 마뜩치 않았다.

자녀들은 몇이냐, 재산은 얼마나 되느냐, 상처한 지 몇 년 됐느냐, 자녀들 직업은 뭐냐, 전에 지병을 앓은 적은 없는가, 속 썩이는 자녀들은 없는가…. 무슨 물어 볼 것들이 그리도 많은 지 사돈의 팔촌까지 죄다 읊고 나면 집 명의를 확인한다, 건강진단서를 떼 와라, 통장을 확인한다….

정작 황씨가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습관이 있는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적었다.
그렇게 실망스런 만남을 가진 날은 황씨는 꼭 몸이 이기지도 못할 술을 과하게 마시고 다음날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꼭 자신이 우시장에 팔려나온 소처럼 이런 저런 조건에 맞춰 등급이 매겨지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나이먹은 사람들끼리 재혼할 때는 필수적인 관례라고 하지만, 황씨 자신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 조건 없이 황씨 하나만을 믿고 살았던 아잉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나 진배없었다. 그런 아잉이 다른 남자의 씨를 가지고 있었으니 황씨는 억장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황씨와 아잉은 서로 등을 맞대고 돌아누운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황씨는 밤새 고민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잉은 베갯잇이 폭 젖을 정도로 소리 없는 울음으로 밤을 보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없었다. 황씨는 어차피 이제 아잉 없이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뱃속에 들어앉은 아이를 지울 수도 없었다. 절반은 황씨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잉의 분신이었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황씨는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아이가 태어나면 세상의 모든 웃음거리는 자신이 다 도맡을 것을 알고 있었다.

황씨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을 떠올렸다. 젊은 아잉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늙마에 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손자 놈들은 도회지에서 자라 싸가지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 가르친 탓이겠지만, 아들 놈들이나 며느리 년들이나 아이 기죽는다고 어릴 적부터 오냐오냐 키운 탓에 손자 녀석들은 안하무인이었다. 평소의 행실은 말할 것도 없고, 어쩌다 용돈이라도 쥐어줘도 모자란 것이 없는 녀석들인지라 고마워하지도 않은 채 당연한 듯 함부로 구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아잉이 낳을 아이는 다를 것 같았다. 순박한 아잉을 닮았다면 아이도 분명 순하고 착할 것이다.

뜬 눈으로 맞이한 새벽, 황씨는 뒤돌아 누운 아잉의 어깨를 가만히 잡아 돌렸다. 아잉은 밤새 운 탓인 지 눈두덩이 퉁퉁 불어있었다.

황씨는 아잉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잉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이다가 쓸어내렸다. 아잉은 그제서야 복받쳤던 울음을 마음껏 터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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