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칼럼] 전직 은행지점장들의 새출발
[심천칼럼] 전직 은행지점장들의 새출발
  • 장한형
  • 승인 2006.09.04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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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등산복 바지가 IMF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엄청나게 팔렸다.

 

신사복 바지처럼 보이는 디자인에다 트레이닝복처럼 신축성이 뛰어나고 가볍고 편해서 지금도 4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 인기가 있다.

 

직장이건 집에서건 이렇게 점잖게 입기 좋은 옷도 드물다.


이것도 우리나라 복식사에 하나의 사연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연일수도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등산복 바지가 베스트셀러가 된 시기와 경제불황으로 실직자들이 많이 생겨나는 시기가 겹친다.

 

“할 일도 없으니 등산이나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양복을 안 입어도 되는 직장인들과 활동적인 장·노년세대에서까지 이 옷을 앞 다퉈 입었다.

 

자칫했으면 ‘실직자 패션’이나 ‘곤궁 패션’이 될 뻔했는데, 사회가 건강하기 때문이었는지 유행의 힘이었는지 ‘국민바지’가 될 수 있었다.


기업은행이 정년퇴직한 전직 지점장 40여명을 재고용했다.

 

이번에 다시 채용된 59세의 어떤 전직 지점장은 인터뷰에서 지난 6개월 동안 해보지 않은 소일거리가 없다면서 등산을 첫손에 꼽았다.

 

나이 들어 가장 의미 있는 소일거리가 그래도 건강에 좋은 등산이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 체력을 바탕으로 인터넷서핑이나 독서도 할 수 있었을 터. 등산복 바지가 유행한 이유를 여기서도 발견한다.


정년을 한 노년세대만이 수행 가능한 업무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특히 기업은행이 고맙다.

 

다른 많은 기업, 기관에서도 릴레이 하듯 신개념의 장·노년세대 일자리를 마련했으면 한다.

 

30년 이상 쌓아온 업무 노하우를 제도적으로 묵히는 것은 수돗물이나 전기를 쓸데없이 소모하는 것과 같다.


일본에서는 연로한 전직 은행지점장이 창구 앞에서 도우미로 봉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고객에게도 좋고, 은행 측에도 좋으며, 참가하는 고령 전직 지점장도 좋은 그야말로 ‘윈윈윈’ 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은퇴한 우리의 고급 기술자들이 동남아 몇몇 나라에서 크게 쓰인다는 보도가 있다. 이것은 국부의 유출이다. 말이 정년이지, 정년퇴직자는 젊은이 못지않게 시퍼런 청춘이다.


전직 지점장이 등산을 한 뜻은 아직 일을 그만둘 나이가 아니라는 항변이기도 하다. 장·노년세대가 활동하는 데 편한 기능성 등산복 바지를 그렇게 열성적으로 입은 것도 마찬가지다. 아직 세상을 도모할 힘이 있다는 자기암시와 사회에 대한 선언이다.


노년세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발상의 심화와 전환을 기대해본다. 검은 등산복 바지를 보며 패전한 일본을 일으켰던 일본의 ‘몸빼’를 생각한다. 그리고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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