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말]가난·아픔, 성공하여 베품으로 씻는다
[남기고 싶은 말]가난·아픔, 성공하여 베품으로 씻는다
  • 이미정
  • 승인 2006.09.04 20: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대 쌀 300석 벌었으나 사업실패로 절망감

내 나이 여든. 일제치하에서 나고 자라 한창 젊을 때 해방과 6·25동란을 겪고, 전쟁의 폐허 위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며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니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 남길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그리 내세울 것이 없다. 모두가 가난했고, 모두가 배고파 허덕였으니 내가 특별할 것이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가난한 시절을 생각하면 수줍어진다. 가난의 경험담을 쓴 책을 보면 훌륭해 보이던 분들도 다시 보일 때가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그들 못지않게 궁벽스럽게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여 내가 또 그렇게 비치지나 않을까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솔직히 밥술이나 먹고 사는 지금 내가 진정 고맙게 생각하는 것 또한 가난이다. 궁핍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조금이라도 베풀고, 베푸는 기쁨을 맛보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한다.

 

빌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이 큰 자선가는 아니지만 내 이름을 걸고 사회복지법인(현죽재단)을 운영하며 다만 얼마라도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또한 가난으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그래서 염치없으나 한마디 남긴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는 가난해도 정이 있었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어야 할만큼 가난해도 따뜻했다. 돌아보면 가난이지만 사실은 가난이 그리 불편한 줄도 모르고 지낸 세월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일생에 누구나 한번쯤은 없이 사는 슬픔을 맛 볼 때가 있는 법이다.


군산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당시 학제로 소학교 6학년 아이들을 인솔하여 모내기를 하러 가던 길이었다. 비가 온 직후라 개천에 물이 크게 불어 있었다.

 

그만할 때 여학생들이 오죽 시끄러운가. 모내기하는 논으로 가는 길이 새떼라도 내려앉은 듯이 소란스러웠는데, 어느 한 순간 ‘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생각해 보니 내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무작정 뛰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정말로 물속에서 손이 나와 나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물가에 난 풀을 잡고 간신히 나왔으나 그건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물귀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이의 손이었다.


건져놓고 보니 아이가 미인 형으로 생긴데다 인근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딸이었다. 이런 경우 인연이라 하여 보통 결혼을 시켰다.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그 애는 그런 가능성을 두고 나를 따랐다. 그 애의 어머니도 생명을 구해준 나를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 집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더니 태도가 싹 달라졌다. 결혼은 물론이고, 당장 만나지도 말라는 것이었다. 가난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이는 나를 좋아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딸을 둔 어머니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피 끓는 청춘이었다. 모멸감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가난보다 창피스럽고 무력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육체적인 고통보다 이런 정신적 충격이 더 오래간다.

 

모진 마음으로 그때 나는 결심했다. 새끼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무명천에 쓴 혈서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때 찍어둔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그때처럼 가슴이 뛴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리 큰 오점을 남기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간다 하지만, 지금은 당대에도 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한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그 여자애의 집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어려움에 처했다고 들었다. 6·25가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내가 부산에서 사업에 어느 정도 성공하여 돌아가 보니 그 집은 그새 가세가 기울어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다. 참 험한 세상이었다.


나는 열심히 살았다. 해방 뒤 군산비행장 하우스보이를 하며 익힌 영어실력으로 군산항에 들어오는 원조물자를 하역하는 일에 통역으로 참여했으며, 6·25 직후에는 그 때의 인맥을 이용해 미제물건을 취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식량이 귀할 때 김제에서 쌀 여섯 가마를 빌려 쌀장사를 시작했다.


전쟁 당시 김제에는 쌀이 흔했지만 익산에서는 귀해 장사를 시작한지 3일 만에 원곡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이문이 컸다. 사업수완이 있었는지, 시대가 그랬는지 나는 금방 쌀 300석을 소유한 부자가 됐다. 20대인 나한테 그 시절 쌀 300석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주변의 아는 사람과 함께 부산으로 갔다. 피난지 부산은 정치 일번지로 나같이 젊고 야심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가 꿈을 펼치기 좋은 곳이었다. 관계되는 사람들이 있어 길게 이야기할 수 없으나, 어쨌든 내 전 재산이라 할 쌀 300석을 나는 부산에 몽땅 쏟았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 유력 정치인의 사무실에서 식객처럼 앉아 있을 때였다. 보좌하는 비서가 찾아온 사람들에게 돌아갈 차비를 일일이 챙겨주었으나 나는 본체만체 했던 것이다. 내 존재는 고작 그 정도였다.
내 일생에서 가장 힘든 한 철이 그렇게 시작됐다. 어떤 외국 시인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는 시어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때가 나한테는 일생에서 가장 지옥 같았다.


300석이라는 재산을 날리고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부산에서 떠돌 때의 막막함, 절망감은 지금 생각해도 답답하다. 너무너무 힘이 들어 죽기로 작정하고 영도의 바닷가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못하는 몸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래, 죽자! 죽어야 산다! 그런데 죽음이 가까워진 그 순간, 어디선가 내게 죽음을 말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서원석 성원제강 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