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벌써 받아 둔 밥상이야”
[독자기고]“벌써 받아 둔 밥상이야”
  • 관리자
  • 승인 2010.04.09 13:14
  • 호수 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상기 노인돌보미·웰다잉 전문강사
“나 지금 곡수에 나가니까, 나 없더라도 와서 옥시기(옥수수) 삶아 둔 것 가지고 가! 냉동실에 넣어 두고 갈 테니까.”

수화기 저편에서 어르신이 숨 가쁘게 이야기를 쏟아 놓는다. 이 어르신은 내게 수시로 전화를 거는 편이다. ‘오늘은 집에 없으니 오지마라’ ‘오늘 내 없을 때 왔다 갔어?’ 등 전화선을 통해 내게 던지는 말로 세상과 소통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 아니 틀림이 없다. 이렇게라도 소통하실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실 터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어르신이 희망근로를 쉬는 날이다. 그래서 모처럼 쉬는 날 곡수에 일보러 가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가 집을 비우니 와서 알아서 챙겨가라는 말씀이시다.

어르신은 이미 80세를 훌쩍 넘기셨다. 깡마른 몸에 키는 껑충하니 크다. 그 모습에 지팡이를 의지해 기우뚱하게 걸으니 얼핏 보면 코믹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어르신은 몇 푼씩 벌겠다고 이른 봄부터 온 산과 들을 헤매며 나물을 뜯는다.

지금은 허리가 너무 아파 깊은 산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주로 얕은 산자락이나 들에서 나물을 뜯는다. 어르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초수급대상자였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1톤 트럭을 사서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유리창을 고쳐주는 일을 하면서 겨우 작은 집 한 칸을 마련했고, 그러다 보니 애꿎게도 이 어르신이 기초수급자 자격이 박탈되었다고 한다.

기초수급자를 되살려 보려고 면사무소를 드나들며 호소도 해 보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면사무소에서 배려를 했는지 어르신은 희망근로에 뽑혀서 일을 나가신다. 하루 일당이 3만원 남짓인데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다.

정 많고 인심 좋으신 어르신이 희망근로로 버는 돈을 어찌 잘 간수하시나 싶어 어렵게 말씀 드렸다.
“어르신 어렵게 버신 돈 잘 간수하세요. 아껴 쓰셔야 힘드실 때 조금씩 쓰지요,”

“벌써 아들한테 김치냉장고 하나 사 주었는걸.”

“예?”

“아들 셋 중 그 아들만 김치냉장고 하나 없지 뭐야! 그것도 맏인데… 그 아이는 인천에서 막노동을 하는데 요즘은 불경기라 일도 많지 않아. 또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이면 공치잖아. 내 그 모습이 하도 보기가 딱해서 눈 딱 감고 작은 김치냉장고 하나 사 주었어. 한 달 치 다 썼어.”

아, 부모란 다 이런 것인가.

“아, 내가 돈 움켜지고 겨울 넘겨 본 적이 있나! 또 어찌 어찌 넘어가겠지. 나야 뭐, 벌써 받아 둔 밥상인데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농촌의 어르신들은 대처 나가 고생을 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미안함이 많다. 특히 어려운 시대를 거쳐 겨우 목숨 부지하듯 세월을 넘겨 온, 특히 곡수 같은 벽촌의 어르신들에겐 그런 생각이 더 큰 것 같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던 세월이라 많은 자식들 뒤치다꺼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니 남과 같이 번듯하니 공부도 시키지 못하고,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까까머리 면하면 대처로 올려 보내 제 밥벌이를 하게끔 했다. 그러나 대처에선들 무슨 별 수가 있던가. 가방 끈이 짧다 보면 자연 몸에 의지하는 일이 대부분. 곤궁은 그렇게 쉽사리 면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살이에 명민한 자식들이야 그래도 세파를 헤쳐 성공을 하고, 명절마다 번듯한 모습으로 귀향을 한다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그렇게 흔하던가. 이 어르신도 자식들께로 향한 큰 빚을 벗지 못하는 어르신들 중 한 분이시다.

어르신은 이 세상에 와서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 떠나나 저제 떠나나 여한이 없다면서 ‘이미 받아 둔 밥상’이라고 말씀 하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