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 (老手別曲) 15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 (老手別曲) 15
  • 관리자
  • 승인 2010.04.19 10:27
  • 호수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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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15)

울타리가 쳐지고, 한월농장이란 간판까지 세워진 황씨의 농장은, 아니 황씨와 베트남인들의 농장은 그럴듯해 보였다. 밭 너머 한 쪽에는 가건물까지 세워지고 있었다. 출퇴근을 하는 이들의 임시 쉼터이자, 아예 들어와 눌러 앉은 두어 명의 갈 곳 없는 사람이 처소로 사용할 집이었다. 이들은 가정에서, 혹은 일터에서 늘 구박받던 사람들이었다. 일머리가 없다고, 눈치가 느리고 행동이 굼뜨다고 툭하면 얻어맞기 일쑤였고, 무시당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능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적절한 일과 위치를 만들어주지 못하면 능력이 있는 누구라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그런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를 제외한 어느 나라에서도 이처럼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피 말리는 눈치작전을 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니 그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한국 땅으로 건너 온 외국인들이 일터에서, 혹은 가정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동료들을 배신하거나 협잡으로 다른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사회를 한번 만들고 나면 그런 분위기가 더욱 그악스러운 분위기를 낳고 다시 그것이 자신들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황씨가 만들어준 이 공간은 끔찍했던 한국사회에서의 고통을 잊게 해준 고마운 곳이었다.

며칠 되지 않아 농장은 시설을 모두 갖췄다. 비닐하우스를 반 넘게 덮어 겨울에도 채소를 가꿀 수 있게 했으며, 숙소로 만들어진 곳에서는 겨울동안 수공예품을 만들 임시 공장 역할을 할 것이었다. 이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일에 있어 절대 행동도 굼뜨지 않았을 뿐더러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알아서 했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아도 누군가 지시하면 따랐다. 또, 자신이 지시할 상황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지시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동체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일이 없으면 노는 날도 있었지만, 그러면 누군가가 자신이 전에 다니던 봉제 공장을 찾아가 하청 일거리를 맡아왔고, 그러면 또 모두 모여 담소를 나누며 가방이나 옷의 실밥을 다듬었다.

사실상 유복이 이 공간의 리더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그는 절대 군림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역할을 맡아 했을 뿐이었다. 황씨는 이 모든 것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이들의 결정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고, 지시하지도 않았다. 황씨는 여태까지 이렇게 완벽한 일터를 보지 못했다. 자신이 노동자로 있을 때는 주인으로부터 서러움을 받았고, 자신이 사람을 부리면 그저 게으름이나 피우려는 녀석들을 단도리하느라 쎄가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달랐다. 황씨가 뭐라 말할 필요도 없었고, 황씨의 말에 한 치의 어김도 없었다. 이들의 자연스레 공경하는 마음은 누가 시켜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황씨는 실제로의 의사결정에 아무 영향을 미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실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그의 권위는 그가 살아오면서 어떤 순간보다도 높았다. 황씨는 이들이 불편해 할 까봐 이들의 숙소에 잘 들르지도 않았지만, 이들은 황씨의 집에 스스럼없이 들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월이는 모든 이들의 꽃이었다. 모두가 한월이를 서로 보려고 해 정작 아잉과 황씨는 한월이를 안아볼 시간도 적었다.

아잉이 몸을 추스르는데도 베트남 아낙들이 모든 역할을 다 해 주었다. 아잉이 몸을 추스르는 동안도 황씨는 걱정하나 할 것이 없었다. 황씨는 배고플 시간도, 무료할 시간도 없었다. 낮이면 유복과 함께 새로운 작물을 심을 계획을 세웠고, 저녁이면 베트남 아낙들과 아잉과 함께 한월이의 재롱을 보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한월은 여러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탓에 낯가림도 심하지 않고 어떤 아기보다도 잘 웃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줬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갔다. 겨울동안 사람들의 관계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이젠 베트남 아낙들의 남편들까지 농장으로 놀러와 함께 노는 일도 잦았다. 젊은이들도 없고, 거의 중늙은이들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은 농촌에서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웃음꽃을 피우기란 쉽지 않았다.

봄이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미 이 농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한계에 다다랐기에 황씨는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돌아서는 이들을 박절하게 내몰기도 난감했다. 황씨는 유복과 함께 사람들과 의논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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