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새 연재 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3
서문로 새 연재 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3
  • 관리자
  • 승인 2010.05.26 17:05
  • 호수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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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아잉이 들어섰을 때, 아잉은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황씨는 지난 두 달간 동네 베트남 아낙들의 조언을 얻어 아잉의 방을 정성스레 꾸며놨던 것이다. 벽 옷걸이에는 베트남 전통의상이 주인을 기다리듯 곱게 걸려 있었고, 가구며 벽지며 베트남에서 익숙하게 봐 오던 것이었다.

아잉이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황씨가 자랑스레 아잉을 이끌고 집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다가 발견한 텃밭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집 마당 한쪽의 텃밭에는 하늘로 향해 솟은 베트남 고추들이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고, ‘라머’같은 채소들도 다소곳이 심겨 있었다.

아잉은 황씨의 배려에 진심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흔히 뉴스에서 들리기를 한국으로 시집가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보다 나쁜 사람을 만나 죽도록 고생만 하고, 사람을 물건취급까지 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어왔던 아잉이었다.

더구나 어머니 뻘의 나이인 황씨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사실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다. 빚으로 집이 몰락하게 된 상황에서 가족들 살리겠다고 말 그대로 ‘팔려가는’ 심정으로 한국 땅을 밟은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결혼약속까지 했던 사람을 놔 두고 한국으로 왔을 때는 그런 결심이 있었던 것이었다. 여차하면 집에 급한 돈만 마련되면 도망쳐 나올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한국인 남편은 베트남 또래 사람들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을 보고는 아잉은 그만 첫눈에 감동해 버렸다.

황씨와 아잉은 집안을 둘러보고 나서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창 앞의 좌식 다탁에 마주 앉았다. 황씨는 아잉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뗐다.

“아잉, 그래 어째 집이 마음에 드는가…?”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아잉이었지만, 황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잉에게 말을 건넸다. 아잉은 말없이 눈만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임자가 나이가 젊고, 나한테 올 사람이 아니란 것은 잘 아네만…. 내가 아잉 자네를 보고 그만 생각을 접을 수가 없어서 자네를 불렀네 그려.”

“내 늙마에 욕심인줄은 아니만…. 사람이 환장하겠는 걸 어쩌겠나…. 부디 원망치 말고, 내가 최선을 다 할 테니, 나와 함께 살아보세.”

아잉은 살며시 눈을 들었다. 그리고 황씨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비록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지막한 황씨의 음성과 간간이 들리는 ‘아잉’이란 자신의 이름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황씨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내비치는 아잉의 미소에 그만 애간장이 녹아버렸다.

오후의 햇살은 비스듬히 기울어 창 안으로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황씨는 불현듯 먼 옛날, 단짝이었던 연주를 떠올렸다. 전쟁이 끝난 직후 황폐했던 논과 밭들. 그리고 그나마도 자신의 땅이 없어 소작을 하면서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땅을 갈아먹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야 했던 아버지. 연주는 황씨네가 부쳐먹던 땅의 주인집 딸이었다.

부모님들이야 지주와 소작의 관계라고 해도,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다니며 함께 커 왔던 단짝이었다. 나이가 점점 차 올라 열서너살이 되자 부모들은 황씨와 연주가 붙어다니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그럴수록 서로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시절. 황씨는 어느 날 아직도 꽃샘추위의 한기가 가시지 않은 다복솔 아래 진달래 꽃다지에서 연주의 뽀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었다.

그 알싸한 살 내음. 열 보 밖에서도 선명히 들릴 것만 같았던 연주의 가슴 뛰는 소리. 이제 막 봉긋하게 솟아오르는 연주의 가슴 속에는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새가 들어앉아 있었다.

아직도 싸늘한 날씨인데도, 황씨의 등짝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남녀간의 교합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나이였다. 그저 무작정 서로의 몸만 어루만지다가 숨만 헐떡대고 있었던 것이다.

옷고름을 풀고, 치마말기를 잡아채 속곳까지 손이 들어갔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무작정 부비다가 황씨는 그만 혼자서 사정을 하고 말았다. 꿈속에서 몇 번 경험해 본 적은 있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경험한 첫 사정인 셈이었다.

그제서야 어린 날의 황씨는 동네 머리굵은 녀석들이 ‘싼다’라고 말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봄날 오후의 혼곤한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가운데 다소곳이 앉은 아잉의 옆 얼굴은 황씨에게 흡사 어린 날의 연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꿀 먹은 벙어리마냥 멀뚱멀뚱 쳐다 보고만 있는 것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황씨는 마른 기침을 몇 번하다가 아잉 옆자리로 자리를 고쳐 앉았다.

황씨는 아잉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아잉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된 처녀가 이렇듯 순진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 황시를 더욱 감질나게 만들었다.

흡사 예전에 연주를 처음 품에 안았던 기분이랄까. 그 터질듯한 감정을 나이 60이 훌쩍 넘어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황씨는 참지 못하고 아잉을 와락 끌어 안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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