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다섯 분의 어머니를 모신 운명
[독자기고]다섯 분의 어머니를 모신 운명
  • 관리자
  • 승인 2010.05.28 11:50
  • 호수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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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석 대한노인회 상주시지회 외남면분회회장

내겐 다섯 분의 어머니가 계시다. 아버지는 기구한 운명 가운데 다섯 곳의 방에 갓을 걸어야했다. 기막힌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내 기억 속 친어머니는 순종을 미덕으로 여기고 남편을 하늘같이 섬기면서 불평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사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근면하시어 농사일만 하지 않고 농한기에는 부업으로 미곡 중간도매도 하셨다.

애주가셨고, 성품은 명랑하고 신명이 있어 놀기를 좋아했지만 심지가 깊은 분이었다. 조강지처의 위상을 지켜주면서 서로를 위해 주는 부화부순(夫和婦順)으로 인정 있게 살아가신 내외분이었다.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던 우리 가정에 질병이라는 운명의 장난이 찾아왔다. 당시는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안정되지 못한 사회라 전염병이 심했다. 우리 마을에도 수인성 전염병인 장질부사가 발생했다. 식구들도 모두 한 차례 아프고 지나갔으나 어머니께서는 마지막으로 발병해 몸져누우셨다.

그동안 지속되는 간병으로 기력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로 병세가 악화되면서 호흡곤란에 이르는 상황까지 찾아왔다. 결국 어머니는 병마와 싸우시다 그만 운명을 달리하셨다. 당시 어머니의 연세는 49세. 아버지는 48세의 장년이었다.

어머니께서 천상으로 가신 후 어느덧 49제가 지나갔다. 농번기가 됐으니 복중이지만 어른들도 계시고 산사람을 위해 득배를 해야 된다는 주위의 권유와 소개로 계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고2의 학생이었다. 문득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면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계모가 계시니 마음 한편으로는 여유가 생기고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계모는 이복동생 남매를 낳고, 화목하게 지냈으나 청춘에 홀로 계실 때 적적함을 달래려고 피우시던 담배를 끊지 못하고 결국 폐암으로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시골 과수원 외딴 집에서 홀로 지내시는 아버지의 생계가 걱정이 돼 우리 두 내외는 서둘러 친지의 소개로 세 번째 새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새어머니는 인정도 많고, 알뜰하게 살림을 하시는 분이었다.

과수원과 논농사도 제법 잘 하셨고, 노후를 위한 저축도 많이 했기에 식구들은 마음을 놓았다.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아버지께서 멀리 출타를 하신 틈을 타서 수년간 모아둔 돈을 몽땅 찾아 멀리 도망을 가버렸다.

우리 내외는 서운함으로 찾아보려고 했으나 아버지께서는 나간 사람 찾지 말라고 하시면서 인연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우리 집사람은 청주와 상주를 오가면서 두 집 살림을 돌보게 되면서 몹시 힘겨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를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는 며느리의 수고를 덜기 위해 직접 네 번째 어머니를 모셔 왔다. 새어머니는 2년 가까이 정답게 지내셨는데 본남편의 자식들이 찾아와서 모셔 가겠다고 했다. 결국 아쉬움을 달래며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간 두 분은 정이 많이 드셨던 터라 아버지는 술로 마음을 달래셨다.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직접 나서 다섯 번째 새어머니를 모셔왔다. 하지만 일 년도 안돼 아버지께서는 다섯 번째 어머니를 내보내셨다.

그동안을 생각하면 일적이 별세하신 친어머니의 옛 모습이 그리워지고 한스러워진다. 30여년간 자식 노릇 하느라고 많은 마음고생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기구한 인명이고, 팔자 탓으로만 돌리기는 너무나 아쉽다.

그 후 아버지는 청주에서 우리 내외와 함께 생활을 하고 계신다. 이곳에서 말벗이 되어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편하다고 하신다. 매일같이 경로당을 나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기력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 같아 마음은 더욱 슬퍼진다. 없어지는 것은 가산이고, 늘어나는 것은 상심뿐이니 우리 내외가 인생의 동반자로 기력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사는 것은 천운의 행복인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께서도 미수를 넘기시고, 89세로 저희 곁을 떠나시면서 ‘여한이 없다’는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저승에서 친어머니를 만나시고 그간 다 겪어보았지만 조장지처가 제일이라고 의미심중한 말씀을 하셨겠지.

그간 며느리로서 기막힌 말 못할 사연을 불평 없이 묵묵히 참아가면서 시부모님을 효심으로 대하고 모셔준 아내의 고마움을 세삼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고 눈시울이 적셔진다.

“여보, 그간 정말 고생 많았고, 정말 고마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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