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독일에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의 오늘은…
45년 전 독일에 파견된 광부·간호사들의 오늘은…
  • 장한형 기자
  • 승인 2010.06.25 11:43
  • 호수 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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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바쳐 번 돈 고국에 송금, 남은 것은 병든 노구뿐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 어르신들을 비롯해 독일에서 외롭게 임종을 맞는 한국인과 동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편안한 죽음을 인도하는 60대의 한인 여성 호스피스가 있다. 독일 베를린 ‘동행 이종문화간의 호스피스’란 단체의 김인선(60·여) 회장. 그는 22세 때인 1972년 독일인 계부의 초청으로 첫발을 디딘 후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호스피스를 선택했다.

이 단체는 독일에서 유일한 동아시아 호스피스 단체이며, 약소한 독일정부의 재정지원을 제외하면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 어르신들을 지원하고 있다. 본지는 이메일을 통해 독일 현지의 김인선 회장을 인터뷰, 간접적으로나마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 어르신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소망을 들었다.

장한형 기자 janga@100ssd.co.kr



- 1972년 독일 이주
- 1979년 간호사 근무
- 2001년 호스피스 팀장 교육 수료
- 2003년 베를린 훔볼트대학 신학석사
- 2005년 사단법인 ‘동행 이종문화간의 호스피스’ 설립
- 2008년 독일연방정부시행 문화 중개사 취득
- 2008년 독일 메르켈 앙켈라 총리로부터 통독기념 감사패 수상

Q. 파독 간호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면.
A. 파독 간호사의 역사는 45년 전인 1965년 카톨릭 계통의 간호학생부터 시작된다. 이후 1966년부터 1971년에 걸쳐 간호사들의 대부분이 유입됐다. 파독간호사들 중엔 장녀가 많았다.

그들은 동생들과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고 열심히 일했고, 매달 수입의 90%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그 당시만 해도 15일을 한 병원에서 일을 하면 다른 도시에서 15일을 일할 수 있을 만큼 독일의 간호사 숫자가 부족했고, 그만큼 일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1972년 이후로 독일에 오는 간호사들이 줄어들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노동조합의 노력으로 간호사 급여수준이 좋아지고 자국인들이 간호사가 되겠다는 숫자가 늘어나서 더 이상 외국인 간호사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1974년 석유파동 후 독일의 경제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던 외국인 간호사(한국, 인도, 유고, 필리핀, 아프리카)들을 그들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때 한국인 간호사들 중 일부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고 일부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A. 파독 간호사의 역사는 45년 전인 1965년 카톨릭 계통의 간호학생부터 시작된다. 이후 1966년부터 1971년에 걸쳐 간호사들의 대부분이 유입됐다. 파독간호사들 중엔 장녀가 많았다. 그들은 동생들과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갖고 열심히 일했고, 매달 수입의 90%를 한국으로 송금했다. 그 당시만 해도 15일을 한 병원에서 일을 하면 다른 도시에서 15일을 일할 수 있을 만큼 독일의 간호사 숫자가 부족했고, 그만큼 일자리가 많았다. 하지만 1972년 이후로 독일에 오는 간호사들이 줄어들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노동조합의 노력으로 간호사 급여수준이 좋아지고 자국인들이 간호사가 되겠다는 숫자가 늘어나서 더 이상 외국인 간호사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1974년 석유파동 후 독일의 경제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던 외국인 간호사(한국, 인도, 유고, 필리핀, 아프리카)들을 그들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이때 한국인 간호사들 중 일부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고 일부는 한국으로 귀국했다.

Q. 당시 간호사들의 업무는.
A.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의 교육수준은 제각각이다. 한국에서 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한 경우, 정규 간호대학 출신자,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간호조무사로 온 경우, 독일에서 간호공부를 한 이들도 있다.

독일과 한국은 간호사의 업무가 전혀 다르다. 파견된 한국인 간호사의 교육정도와 상관없이 독일에서 간호사 역할은 일률적이었다. 혈청주사를 놓거나, 약물을 혈관으로 투여하는 것은 의사들의 업무였고, 간호사들은 환자를 전인적으로 돌보는 일을 하게 돼 있다.

명칭도 간호사가 아니라 ‘Schwester’(직역하면 언니)로 친근한 호칭이며, 보통 간호사의 이름을 불렀다.

아침에 환자를 씻기는 일부터 병원 음식 배급과 먹여주는 일, 목욕 등이 주업무였다. 한국에서 가족이나 간병인이 해야 할 일을 독일에서는 간호사가 해야 한다. 간호사나 간호조무사의 업무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다만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같이 일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은 간호사에게 주어진다. 이런 차이 때문에 한국인 간호사들과 독일인 간호사들 사이에 마찰이 있곤 했다.


한국 가도 할 일 없고, 신세질 일 두려워 독일 머물러
부모 자식간 돈계산하고 외국인 차별하는 문화 서러워
한국의 ‘고향 맛’ 느낄 수 있는 노인복지관 건립 절실

▲ 독일로 떠나는 파독 간호사(왼쪽)들과 고열을 견디며 채탄 중인 파독 광부.

Q. 파독 광부·간호사들의 당시 생활상은.
A.간호사들은 한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 집을 장만해 주거나 동생들의 학비 등을 조달했다. 심지어 맛있는 초콜릿이나 먹을 것이 생기면 동생들 생각에 모아뒀다가 보낸 이들도 있었다.

당시 독일 전역에는 한인교회가 생겨나면서 한국 목사들을 초빙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한인회, 여성회, 간호요원회 등이 구성되고 이들의 단체활동이 시작됐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독일사회에 정착하면서 이방인으로서의 어려움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고, 서로 향수를 달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도 재료가 없어 시장에서 양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가 먹는 등 식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도 많았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한국으로 빨리 되돌아가고 싶은 외로움도 견뎌야 했다.

결국 외롭고 냉냉한 이국생활의 외로움은 한국인 남녀가 쉽게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당시 광원들은 노동계약이 끝나고도 남아있을 수 있는 대안으로 한국 간호사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물론 그중 많은 한국간호사들이 독일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았다.

이외에도 한국에 자녀들을 두고 온 어머니, 부인과 자녀들에게 “돈 벌어 3년 후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온 광원들은 오로지 돈을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희망으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기다리던 3년이 30년 이상 긴 세월이 돼 독일에서 살게 될 줄은 생각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지하 탄광에서 얼마나 힘든 일을 했는지, 현장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광원들이 나이가 들어 여러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뤽 아우프’(Gluck auf, 지하 갱에 들어가는 광원에게 무사귀환을 비는 인사)일 정도로 위험했다.

땀에 쩐 속옷을 여러 번 짜야 할 정도로 덥고 위험한 곳에서 막장의 선두로 일했다. 그들에겐 독일어를 배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하루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일만 열심히 했다.

그동안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점차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됐고, 이곳에 남은 이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을 지켜보며, 발전하는 조국의 뉴스를 들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늘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들은,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보험회사에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연금을 가입해 3년마다 저축된 연금을 목돈으로 모아 한국에 보내곤 했다. 그러다보니 나이 들어 연금을 받을 시기엔 남는 연금이 적어 정작 그들의 노년은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 ‘타향살이 40년’ 파독광부 모국 방문 1960〜1970년대 독일 땅에서 ‘외화벌이’에 나섰던 파독 광부들이 지난 2008년 10월 28일 오후 ‘타향살이 40년’만에 모국을 방문, 인천공항에서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노동부의 ‘파독광부 복지사업’ 일환으로 초청된 이들은 닷새 동안 전주, 남원, 제주, 서울 등을 관광하고 광양제철소와 울산 현대중공업 공장을 들러 모국의 산업발전상을 직접 확인했다.
Q. 파독 광부·간호사를 재조명하자는 논의가 있는데.
A. 파독 역사 45년이 된 지금,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상황에 관심을 갖고 해외이주 역사가 재조명돼야 한다는 논의를 자주 접한다. 개인적 소견을 전제로 파독 간호사들에 대한 재조명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우선 한국간호협회는 이곳 독일에 온 간호사들의 현 실태를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 정식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사만이 간호협회에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이 독일에서는 적용돼서는 안 될 것이다.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파견된 뒤 공부해서 정식간호사가 됐거나 아직 간호조무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줘야 한다.

둘째로, 독일에서 아직 간호사로 근무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앞으로 5년 내 현직 한국인 간호사는 사라질 것이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종자돈을 보내준 그들은 이미 늙었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한국으로 휴가를 가더라도 거처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대접해 주고 그동안의 수고를 알아주며, 인정해 주는 시설 등 일정 사회시스템이 필요하다. 또한 그들이 역사의 작은 귀퉁이로 사라지지 않고 한국발전에 기여한 사실이 기억돼야 한다.

셋째, 한국적인 정서로 함께 즐길 수 있는 독일 내 한국과 같은 노인복지시설의 확충이 필요하다. 정부와 사회단체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독일도 고령화 시대에 들어섰다. 독일인들의 평균 연령이 80~90세에 도달하고 있지만, 이곳에 노동자로 온 외국인들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

그들은 먹을 것을 아끼면서 어려운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았고, 언어·정서·종교적 문제로 받는 일상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자신의 노년을, 태어난 나라와 독일 중 어디서 보내야 하는지 매일 고민하는 그들의 상황이 세상과의 이별을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이미 상당수가 50대 중반 혹은 60세를 갓 넘긴 나이에 암 등 중증질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유교적 가부장제도 속에서 자란 그들은 성인이 돼서 독일에 왔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그리워하고, 늘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그들은 독일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일말을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선뜻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독일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문제보다 한국으로 돌아간들 딱히 할 일도 없고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살 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Q. 독일 노인문화와의 이질감이 있다는데.
A.
독일인들의 생활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사람으로 길러지며, 그들의 교육은 엄격하다. 어린아이는 취침시간이 되면 혼자서 울다가 침대에서 자야 한다.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잠들기를 원하지만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늘 모든 일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논리적인 사고를 배운다.

18세가 되면 성인으로 자립할 수 있는 자녀들은 독립적으로 혼자서 생활한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서부터 공부와 일을 하면서 생활하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에도 철저하게 돈 계산을 한다. 또한 결혼을 해도 부모들에게 결혼 비용을 부탁하지 않으며, 많은 사람을 초대하지 않고 가족들끼리 간단하게 치른다.

나이가 들어 양로원에 들어가거나 혼자 살 때도 자식들이 도와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철저히 개인적인 주장과 판단으로 교육돼 있는 독일인들은 오히려 자녀들과 같이 한 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어려워한다.

이 같은 독일의 개인주의적 문화에서 살아야 하는 나이 든 외국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독일 여론조사 결과 90% 이상이 자신이 살던 집에서 죽고 싶다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우선 거의 대부분 노인들이 혼자 생활하고 있는데, 자녀들이 있어도 다른 도시에서 살거나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경우도 있고, 같은 도시에서 살아도 직장상황 및  평소 부모와의 관계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 연락하거나 방문하는 형편이다. 늙어서 자녀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기 때문인지 별다른 불평이 없다.

Q.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없나.
A. 본인이 독일에 온 1972년과 현재의 상황은 많이 변해 있다. 독일 노인들은 한국에서 온 백의천사를 좋아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성실하고 친절했다. 동양의 헐벗은 작은 나라에서 온 백의의 천사들은 궂은 일도 척척 해내는 일벌레였다. 하지만 그 당시 별로 많지 않았던 외국인 수는 현재 독일인구의 20%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외국인 숫자가 늘어나면서 점차 외국인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사실 외국인들을 제외하고 독일 민주주의 발전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기여도가 크다. 그러나 국가적 행사에 외국인들은 초대되지 않는 등 여전히 외국인 문제는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독일 이민사 60년이 되는 이탈리아인들을 비롯해 한국인들과 비슷한 시기에 온 터키 사람들은 이미 4세대가 살고 있다. 터키 1세들 중에는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 병원이나 관공서를 가야할 일이 있으면 손자를 통역으로 데리고 가기도 한다. 또 종교가 다른 데서 오는 마찰 또한 크다.

Q. 한국인 중 기억에 남는 사례는.
A. 얼마 전 6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모씨는 사는 동안 망향으로 눈물진 경우다. 이씨는 부인이 간호사로 먼저 왔고, 나중에 초청돼 독일에 왔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어린 아들과 독일로 왔다.

늘 부지런해 주위 사람들을 도왔고, 긍정적이고 활발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지만 죽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다. 살고 싶어 몸부림치면서 이렇게 가기는 너무 억울하다고 울부짖었다.

고향을 등지고 남의 나라에 와서 그곳이 제2의 고향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죽음 앞에서는 솔직해진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이 계신 선산에 묻히고 싶어 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삶의 무게를 느끼며 마지막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게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생전 고향의 맛이 느껴지는 공간에서 ‘고향 기분’을 만끽하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간절히 소망한다. 뜨끈한 아랫목에 이부자리를 펴놓고 옛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공간과 시간이 독일 땅에도 허락되길 말이다. 독일 내 한국 노인들을 위한 노인복지관이 건립되길 꿈꾸며, 오늘도 이곳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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