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壽 & 白首 - 초야에 묻혀 있는 지혜로운 노인
白壽 & 白首 - 초야에 묻혀 있는 지혜로운 노인
  • super
  • 승인 2006.08.17 22: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학생만 되어도 아이들은 벌써 힘자랑을 한다. 학교마다 아이들 말로 ‘쌈짱’이라는 주먹이 제일 센 아이가 있고 그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한다.

 

어디 ‘센 놈’이 있는지 인터넷 같은 데에 수소문하고 숫캐처럼 나가서 콧등이 깨져서 돌아오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실력이 있는 사람은 늘 누군가의 도전을 받게 되고 숨어 있을 수가 없다. 과학이나 그림 같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기원이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한 노인이 한국기원을 찾아가 “여기서 바둑을 제일 잘 두는 사람을 데려 오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일생동안 바둑을 둬서 누구한테도 져본 적이 없는데, 한국기원이라는 데가 설립되어 한국의 대표 노릇을 한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깊은 산골에 사는 노인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뿐 바둑깨나 둔다는 사람이라면 한국에서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사람들이 한국기원에 적을 두게 되었다는 정도는 아는 일이었다. 그러나 초야에 이런 기백의 노인이 있다는 것만도 반가운 일이었다.


바둑은 두뇌싸움이다. 육체적인 일이라면 젊은이를 이기지 못하겠지만 두뇌나 정신으로 하는 게임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50여 년쯤 전에 일어난 일로 실화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 같은 세상에 초야에 묻힌 숨은 인재가 과연 있을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일화다.


마라톤이나 골프, 권투 같이 혼자 하는 스포츠 종목에서는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가 거의 없다. 바둑이 그렇듯이 이기고 지고가 칼로 무를 자른 것처럼 분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최고 잘 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어서 어떻게든 발굴이 된다.


한국기원을 찾아간 노인의 실력은 프로 기사에게 3점에서 5점 정도를 붙여야 하는 실력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당시로서는 군(郡)단위 안에서는 상대할 사람이 없는 정도의 고수였다.

 

장소가 낯설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바둑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연로한 것이 문제였을 것이라고 한다. 바둑이 두뇌싸움이라고 하지만 젊음에는 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둑의 경우에서 보듯이 화투의 ‘고스톱’이나 서양의 포커게임 같은 게임도 초야에 숨은 고수는 거의 없다.

 

체력보다는 두뇌의 문제이지만 머리가 빠릿빠릿한 젊은이들이 단연 낫다. 경로당 고스톱 실력으로 대학생쯤 되는 손자나 손녀와 해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실력이 된다싶으면 젊은이들은 세상의 경쟁자들을 찾아 겨뤄서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초야에는 사람이 없다.


주식이나 경마 같은 종목은 더더욱 실력자가 숨어있기 힘들다. 무엇보다 당장 돈이 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 노출이 된다. 게다가 드러나지 않고서는 그가 실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길도 없다. 이런 분야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초야에 있어서는 경쟁력이 없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들의 경험은 어떨까. 경험과 지혜가 있으므로 해볼 만하지 않을까. 아직 현역에서 뛰고 있는 이 분야 대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노인들은 어렵다.

 

젊은이보다 적게 잃고 망하지 않는 정도다. 산전수전 다 겪어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능하지만 크게 얻을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더라고 아무래도 노인들은 투자하는 곳에 작은 징후만 있어도 움츠린다.

 

그에 반해 젊은이들은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불구덩이인지 물구덩이인지 모르고 뛰어든다. 그렇게 해서 설사 큰돈을 잃어도 젊은이에게는 복구할 기회가 있다. 주식이나 경마에서 젊은이들이 그래서 횡재할 가능성이 많다.


로또복권 같이 운이 좌우하는 게임은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노인도 해볼 만하다. 하지만 역시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 나라 6/45방식의 로또복권의 1등 당첨 확률은 814만분의 1이라고 계산이 된다.

 

골프를 쳐서 한 번에 홀컵에 들어가는 홀인원의 확률이 3,500분의 1이고, 정선 카지노의 잭팟이 터질 확률이 400만분의 1이라는 것만 보아도 로또복권 당첨이 얼마나 희귀한 일인지 알 수 있다. 홀인원은 골프공을 3,500번을 쳐서 한번 홀컵에 들어간다는 정도이고, 잭팟은 400만 번을 해서 한 번 된다는 얘기다.


로또복권 당첨도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 스스로 번호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당첨번호를 짚어내기 위해 온갖 모험을 다 한다.

 

당첨될만한 숫자를 찾아내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 인터넷도 찾아보고, 꿈도 꾸고, 기도도 한다. 감각도 감각이지만 노력도 무척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쏟아붓는다. 매월 월급의 3분의 1을 넣는다는 로또복권 마니아도 있다.


우리 나라 로또 초기에 당첨금이 누적되어 1천억 가까이 되었던 적이 있다. 이때 은행에서 한 8백억 원쯤 융자를 받아서 당첨 가능한 숫자 조합 814만 개를 모두 써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얘기들이 있었다.

 

당첨이 되기만 한다면 은행 융자를 갚고도 100억 원은 거뜬히 남기는 장사였다. 결론은 당첨불가였다. 은행이 협조할 리도 없지만, 카드에 그 모든 숫자를 빠지지 않게 기록하고 컴퓨터에 입력시키는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행운이 있는 사람도 초야에 묻혀 있기 힘들다.


지금부터 3천여 년 전쯤에는 초야에서 인재를 찾아내는 일이 흔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강태공이 그랬고 제갈 공명이 그랬다. 강태공은 70살이 될 때까지 초야에서 낚시질이나 하며 때를 기다렸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과 문왕에게 나라와 군대를 움직이는 법을 일러주는 형식으로 구성된 육도삼략(六韜三略)은 중국사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병서로 꼽힌다.

 

한(漢)나라의 개국공신인 자방 장량은 황석공이라는 노인으로부터 강태공의 ‘삼략’을 전설처럼 입수하여 큰 전공을 세운다. 공신들이 죽임을 당했으나 장량은 말년이 행복했다.

 

어려움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즐거움을 함께할 사람이 못된다고 판단하고 일찍이 유방 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초야에 인재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대는 문명의 변화가 빨라서 초야에 있는 동안 문명이 다음 세대로 바뀌어버린다.

 

강태공 시절만 해도 한 가지의 지식과 정보로 수백 년 동안 울궈먹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불과 1, 2년 사이의 지식도 낡은 것이 되기 쉽다.


그런데 정보통신이 크게 발달한 요사이에 다시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초야에서 지낼 만하게 됐다. 어느 첩첩 산중에 있어도 세계의 첨단 정보를 접할 수 있고, 택배 같은 서비스를 통해서 외국산 책이나 옷 같은 것도 살 수 있다.

 

실력도 있고 돈을 벌 수도 있으며, 모험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현역이 아닌 보통 은퇴 노인들이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는 이제 낯선 얘기가 아니다.

 

예전에는 향토예비군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무서운 나라였다면, 앞으로는 정보통신을 활용하는 초야의 재원이 풍부한 나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무서운 나라가 될 수도 있다.??


해석을 누가 하느냐, 어떤 관점에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예술 분야에는 근대적인 초야의 인재가 많이 있다.

 

인터넷, 텔레비전, 휴대전화 등으로 지방과 중앙의 경계가 무너지고는 있지만 지방 나름의 대가가 있고 나름의 문화가 형성돼 있다. 초야의 대가와 중앙의 대가가 겨루는 승부는 오늘날 무의미하다.

 

하지만 초야의 인재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사회가 풍성해진다. 특히 예술적 가치가 당대에는 외면당해도 언젠가 빛을 볼 수도 있고, 트렌드의 변화가 당대에도 급격하기 때문이다.?


채근담에 늙어서 생기는 병은 젊어서부터 스스로 불러들인 것(‘노래질병((老來疾病) 도시장시초적(都是壯時超的)’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들은 관심이 별로 없지만 자주 들려주다 보면 귀담아 듣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