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별곡 (老手別曲)]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1)
[노수별곡 (老手別曲)]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1)
  • 관리자
  • 승인 2010.07.02 11:44
  • 호수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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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로 연재소설
“아니, 이게 말이여? 막걸리여? 사람 희떱게 봐도 유분수지. 이놈의 영감쟁이, 어디다 대고 돼먹지 않은 수작이여?”

‘잘.못.걸.렸.다.’

어쩐지 오늘 일이 너무 잘 풀려간다 싶어 불안하더니, 기어이는 망신을 하고 말 품새다. 애초부터 눈매가 날카롭게 말려 올라간 상이 나름 성깔 있겠다 싶었는데, 기어이 사단이 났다.

“아니, 이여사…. 내 말은 그 말이 아니구. 오해하지 말라니깐.”

장씨는 다급히 말을 가로 막았지만, 이미 이여사는 기세 등등하게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났고, 그 서슬에 흔들린 탁자에서 쏟아진 막걸리가 장씨의 새로 산 고어텍스 등산화 위로 흘러내렸다.

거나하게 오르던 술기가 일순간 싹 걷히고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그 와중에서도 장씨는 막걸 리가 쏟아져 얼룩이 졌을 새로 산 고가의 등산화가 신경이 쓰였다. 무려 두달치의 기초노령연금을 모두 모아야 살 수 있는 신발이다.

‘이런 염병…. 이게 몇 달을 모아 산 건데.’

이여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걸리 집을 나섰다. 장씨도 급히 셈을 치르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뒤를 따라 나왔다. 저녁 8시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길어진 여름 해 탓에 밖은 훤했다. 산행을 마치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장씨는 배낭을 메고 힘겹게 이여사를 따라잡았다.

“아니, 이여사.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그렇게 가버리는 게 어딨어요?”

“듣기 싫어요. 점잖게 생기신 분인줄 알았더니, 그렇게 수작이나 걸려고 그래 싫단 사람 억지로 술을 먹여요?”

“수작은 무슨 수작을 걸었다고 그럽니까. 난 그저 이여사하고 이야기나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시끄러워요! 첨 만난 사람들이 그래 ,이야기를 여관방 잡고 한답니까?”

“아니,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해요. 난 그냥 산행도 했고, 피곤하니까 그냥 물어본거지. 그리고 여관방이라니! 요즘의 모텔이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써….”

장씨는 이여사로부터 뒤처지지 않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재게 발을 놀렸다. 뭔 놈의 할망구가 다 된 여자가 발걸음은 김연아 몸놀림 저리가라였다.

“됐어요. 말 붙이기 싫으니깐, 딴 데 가서 알아봐요.”

더운 날씨에 하루종일 땀을 흘렸고, 호기롭게 막걸리까지 벌컥벌컥 거푸 두되를 마셔댔으니, 장씨의 얼굴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여사의 발걸음은 날다람쥐같이 날렵하게 산 아래로 향했다.

‘에라, 모르겠다.’

장씨는 결국 따라붙기를 포기했다. 등산로 초입에 자리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오, 아름다운 나의 피앙세는 떠나가버렸도다. 장씨는 술에 취해 말이 헛 나온 자신의 입을 쥐어박았다. 아, 하필이면 그때 그딴 말이 튀어나오다니.

주말마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지 이년 째에 접어들었지만, 이여사만큼 기품있어 뵈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혼자 산에 오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은 장씨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한달 전부터 두어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용기를 내 처음 말을 걸어봤고, 이여사도 장씨가 싫지 않은 듯 저녁을 겸한 반주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장씨는 흡사 젊은 날 극장 앞에서 여고생 꼬시던 기분으로 돌아가 아주 애가 닳았다.

등산로에 즐비한 막걸리 집 중에서 최고로 좋아보이는 집으로 들어가 최고로 비싼 안주를 시켰다.

막걸리도 늘 먹던 플라스틱 통 막걸리가 아닌, 인삼 동동 뜬 인삼동동주로 시켰으니, 이날 황씨가 들인 공은 한달 간 이제 숟가락만 빨기를 작정한 것이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수저세팅부터, 물도 직접 떠다 주는 등 뭐 하나 불편한 것이 없는가 최선을 다해 서빙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이여사는 분명 그동안 심심풀이로 만났던 다른 아줌마들과는 질적으루다 달랐다.

먼 발치에서만 봤던 이여사는 가까이서 보니 더 기품있어 보였다. 젊어서야 섹시미가 최고라고 하지만, 나이 먹어서는 무엇보다도 ‘기품’이다. 손짓 하나, 눈매 하나에도 절제된 우아함이 흐르고, 대화에도 절도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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