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의 노인복지정책 및 노후생활 - 뉴질랜드 ③
세계 각국의 노인복지정책 및 노후생활 - 뉴질랜드 ③
  • 관리자
  • 승인 2010.07.09 10:46
  • 호수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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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애인·저소득층 의료비 전액 무료 혜택

박재간 대한노인회·한국노년학회 고문 / 한국노인문제연구소 명예이사장

남태평양의 서남단,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은 뉴질랜드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잘 정리된 사회제도, 민주주의의 전통 등으로 인해 자연과 인간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남반구의 낙원으로 일컫어지고 있는 나라다. 마오리 원주민들의 안식처였던 뉴질랜드 섬이 최초로 외부세계에 알려진 것은 불과 300년 전의 일로 네덜란드의 항해사 타스만(Tasman)과 그의 뒤를 이어 이곳을 찾았던 영국의 제임스쿡(James Cook)선장에 의해서 이다.

뉴질랜드는 면적이 26만7707㎢인데 인구는 432만명으로 인구밀도는 ㎢당 16인 내외에 불과하다. 뉴질랜드는 역사적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점 때문에 인종, 종교, 사상, 사회관습, 그리고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도 영국과 상호간 밀접한 관련이 지속되고 있다. 뉴질랜드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840년 영국의 이주민과 원주민인 마오리족 간에 평화적으로 공존하자는 내용의 ‘와이당키조약’(Treaty of Waitangi)을 체결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870년경부터는 영국의 이주민이 점차 늘어났고, 그들은 주로 목축과 양모업에 종사했다. 이 양모와 냉동육을 모국으로 수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중산층·고소득자, 국공립병원 무료… 민간병원 본인 부담
자녀가 몸 불편한 부모 수발하면 인건비도 국가가 지급해
생계비-노령연금법 간호간병·의료비-보건의료법으로 해결


뉴질랜드의 의료보장제도는 우리나라와 같은 의료보험방식이 아니라 조세부담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1938년 사회보장법이 제정된 이후 뉴질랜드 국민들은 이 제도에 의해 국공립병원은 물론, 민간병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료기관의 진료비와 입원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경제 불황으로 인해 국가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당시 노동당 정권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그때까지 실시해오던 의료비 무상제도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래서 일정소득 이상의 국민은 의료비의 일부를 자부담하는 정책 전환이 고안됐다.

뒤이어 탄생한 국민당정권은 이전에 노동당 정권이 취한 바 있는 정책만으로는 재정적자를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의료비 부담을 더욱 감축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1993년 의료비의 이용자 부담률을 더욱 확대하는 내용의 ‘보건의료법’(The Health and Disability Act)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당 정권은 보건의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이것을 보험방식으로 전환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이전처럼 조세부담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재정을 절감하는 방법을 모색하느냐에 대해 적지 않은 논쟁을 거듭한 바 있다.

보험방식은 국가의 의료비 부담을 경감시키는 최선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의료비의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정권은 조세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보건의료법을 고수한 바 있는데, 그 배경에는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시키는 정책이 더욱 우선돼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민당 정권에 의해 개정된 이 법에 따르면 노인과 장애자, 그리고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이전과 다름없이 의료비 무료혜택을 주도록 했다. 하지만 중산층 또는 그 이상의 고소득자들에게는 국공립병원을 이용하는 경우에만 진료비 및 의료비를 무료로 하고, 일반 민간병원을 이용할 때는 전액 이용자가 부담하도록 했다.

따라서 중산층 또는 그 이상의 고소득자는 세금은 많이 내면서도 의료혜택 측면에서는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와 같은 국가정책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는 국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뉴질랜드의 보건의료서비스는 보건성의 하부기관인 병원위원회가 관장한다. 그리고 병원위원회 산하에는 지역단위로 설치, 운영되는 국공립병원과 민간부문에서 운영하는 개업의 등으로 구성된다. 국공립병원은 주로 해당지역 환자들의 2차 진료와 응급진료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외에도 지역 내에 소재하는 요양시설과 재가노인 및 장애자들에 대한 수발 및 간병서비스까지도 총괄해서 관장한다.

간병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령자에 대한 사업내용으로는 노인요양시설 등에 수용돼 있는 노인에 대한 의료 및 간병서비스, 심지어 가사지원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병원위원회는 간병받기를 원하는 노인들에 대해서는 해당자가 과연 서비스를 받을 필요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 또는 평가하고,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대해서는 시설에서 보호할 것인지, 자택에 그대로 머물게 하면서 간병사 또는 가사조력원을 파견,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 결정한다.

뉴질랜드 보건성은 노인에 대한 간병서비스와 관련된 사업의 많은 부분을 민간단체에 위탁 경영케 하고 있다. 민간단체가 보건성의 위탁을 받아 수행하고 있는 업무 중에는 노인요양시설에 수용돼 있는 노인들에 대한 서비스 이외에도 재가노인을 위한 식사배달, 입욕서비스, 청소와 세탁, 그리고 병원 입원시 교통편의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재가노인을 위한 서비스 프로그램 중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자녀가 자택에서 부모를 보살피기 위해 직장을 포기했을 경우 그 인건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제도(Domestic Purposes Benefit)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부양은 자식의 의무라는 사회규범이 통용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제도다. 그러나 서구사회가 다 그렇듯 뉴질랜드 역시 고령자 부양의 제1차적 책임은 국가가 져야 하는 것으로 돼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자신의 부모를 보살피는 경우도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2004년 뉴질랜드 방문기간 중 오클랜드시의 데이비드 버틀러(David Butler) 보건과장직을 만나본 일이 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경우 자녀가 보살피는 것이 해당 노인들의 정신적 또는 정서적인 측면의 안정된 생활을 꾀할 수 있고, 국가의 복지비용 절감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정책을 계속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가 노인입소시설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눈치 챈 버틀러 과장은 오클랜드 시내에 있는 노인입소시설 ‘엘우드 빌리지’(Ellwood Village)를 안내했다. 이 시설은 장로교 계통의 사회복지재단에 의해 1991년에 설립됐다고 하는데, 개원 초기에는 요양시설만을 운영했으나 그 후 건강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인주택과 치매센터 등도 부지 내에 신축했고, 뒤이어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일반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보호시설 운영사업까지 겸하게 됐다고 했다.

오클랜드 시내 주택가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시설은 대지면적 5에이커(ac, 약 6120평) 안팎이었고, 시설규모는 1만6528㎡(약 5000평)을 역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됐는데, 그 중 건강한 노인들이 입주한 단독주택은 120세대, 노인요양원에는 92실, 치매환자를 수용하는 시설은 12실이었으며, 주간보호를 위한 시설은 100평 내외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공용시설로는 낮에 동료노인들과 같이 취미오락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된 495㎡(150평) 내외의 클럽하우스가 설치돼 있었으며, 그곳에는 당구장, 공용식당, 다목적강당, 도서실, 데이센터(day-center) 등도 있었다.

이 노인요양시설에 입주하고 있는 노인들의 경우 주택관리비는 주택보조수당제도에 의해 충당됐다. 또한 생계비는 노령연금법에 의해, 그리고 간호간병과 의료서비스에 소요되는 비용은 보건의료법에 의해 해결되고 있어 입소비용의 본인부담은 전무하거나 일부 부담하는 경우도 극히 경미했다.

<다음 호부터 프랑스편이 연재됩니다.>

한국전 참전 뉴질랜드 용사 기념식
육·해군 등 6천여명… 해군 함정 2척 참전

7월 3일 뉴질랜드 남섬 북단 항구도시 픽튼에서는 한국전 참전 용사와 국방장관, 인근 도시 말버러 시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전 참전 기념식이 열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은 60년 전과 같은 기백으로 북소리에 맞춰 픽튼의 중심가를 행진한 뒤 픽튼 전쟁 기념비에서 기념식을 갖고 이국의 전장에서 꽃잎처럼 흩어져간 전우들의 넋을 기렸다.

이들은 이어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퀸 샬럿 만의 바다 속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뉴질랜드 해군의 푸카키함과 투티라 함 등 두 척의 함정을 기리는 꽃다발 두 개를 바다에 던져 넣기도 했다.

7월 3일은 바로 조국의 명령에 따라 뉴질랜드의 젊은 병사들을 태운 푸카키함이 60년 전 오클랜드 북부 데븐포트 항을 떠났던 날이다.

이날 기념식에서 앨리스테어 사우먼 말버러 시장은 푸카키함과 투티라 함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유산을 후세에 남겨주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과거를 잊는다면, 우리들을 표류하지 않게 해주는 닻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앤드루 너톨 해군 중령은 “뉴질랜드는 한국전 기간에 비교적 작은 규모의 부대를 보냈으나 그들의 충성심과 열의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 참전용사의 아내는 “밤에 오클랜드 시내에 있는 시민회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극장 스크린에 갑자기 푸카키함 장병들은 즉시 함정으로 귀대하라는 글자가 화면에 나왔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영화를 다 보고나서 헤어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 게 토요일 밤이었는데 푸카키함은 불과 이틀 뒤인 월요일 한국을 향해 힘찬 항진을 시작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푸카키함에서 부산항을 드나드는 보급선들에 대한 호송임무를 주로 수행하면서 한국 해역에서 6개월을 보낸 뒤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홍콩에서 부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사고 뉴질랜드로 귀국했다.

뉴질랜드는 유엔군의 깃발 아래 한국전쟁에 4700명을 참전시켰고 이밖에 1350명의 해군도 별도로 파견했다. 뉴질랜드군의 한국전 희생자는 사망 45명, 부상 81명을 기록했고 1명은 포로로 잡혀갔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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