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별곡(老手別曲) - 그대품에 잠들었으면(11)
노수별곡(老手別曲) - 그대품에 잠들었으면(11)
  • 관리자
  • 승인 2010.09.17 14:20
  • 호수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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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로 연재소설
“내려갑시다.”

아주 느리게 담배 두 대를 피우고 난 뒤, 최씨는 입을 열었다. 최씨는 마음이 복잡할 때는 거의 생담배를 태우다시피 담배를 천천히 피우는 버릇이 있었다. 유씨는 말없이 따라 나섰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오자 유씨가 최씨의 셔츠 소매를 붙잡았다.

“괜찮으시면 술 한잔 사주세요.”
최씨는 벌컥 화가 치밀었다.
“왜, 이젠 내 차례가 됐소?”

유씨는 거의 울상이 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길에 서 있었다.
“미안하오. 내가 뭐라고. 내가 당신에게 이럴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 갑시다. 시간당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의도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말이 비틀려 나왔다. 왜 이리 화가 나는지 최씨 자신도 알지 못했다.

유씨가 안내한 곳은 허름한 여인숙이었다. 여인숙이라고는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옛날집의 여인숙에 숙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아마도 유씨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장기 투숙하고 있는 공간인 듯 했다. 어디선가 중년 넘은 아줌마들이 중늙은이들을 데리고 여인숙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최씨와 유씨는 근처 가게에서 술을 사와 유씨의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서자 유씨는 말없이 최씨의 잔에 술을 따랐다. 최씨는 벌컥벌컥 단숨에 맥주 한잔을 비웠다. 흥분된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그제야 형광등 불빛에 드러난 유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띄게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예전의 그 편안함이 묻어나는 얼굴. 급하게 들이켠 맥주가 속에서 찌르르 울렸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소?”
“….”

유씨는 말없이 자신의 잔을 비웠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유씨는 별말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대화가 없으면 답답하고 불편한 법인데, 유씨와 함께 있으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말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느낌이랄까.

목이 타기도 하고 울적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편안함’이 어우러져 최씨는 잘 하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취기가 오르고 유씨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최씨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최씨가 벽에 기대 깜빡 졸다 깨다 하는 동안 유씨는 말없이 혼자 술을 비웠다. 취한 중에도 유씨가 나지막히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듣다가 졸다가 하면서 잠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나지막히 흥얼거리는 노랫가락, 그리고 중얼거리는 뜻 모를 말들. 최씨가 간신히 정신을 추슬러 알아듣고자 했던 말들은 너무 쉽게 흩어져 기억으로 잡아 넣을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유씨는 술자리를 치우고 최씨를 자리에 눕혔다. 최씨의 셔츠와 바지를 벗기고 옆에 앉은 유씨는 최씨의 쓸린 목덜미에 정성스레 약을 바르고 문질러 줬다.

그리고는 수건을 빨아와 최씨의 온 몸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취중에 혼곤한 정신으로도 최씨는 몸이 공중에 붕붕 뜬 느낌이었다. 시원하고 안락하고, 세상에 어떤 편안한 잠자리도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씨는 최씨의 옆에 누워 최씨의 팔을 베고 잠들었다. 취중에도 최씨는 자신의 팔에 유씨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유씨는 보이지 않았다. 최씨는 단추가 떨어졌던 자신의 셔츠가 깨끗이 손질돼 개켜져 있었고,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자신의 신발을 볼 수 있었다. 벌써 날이 환히 밝아 있었다. 자신과 유씨가 어제 밤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토막토막 남은 기억은 유씨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정성스레 젖은 수건으로 닦아 줬다는 것과 팔에 느껴졌던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가본 여인숙에서는 그녀가 방을 빼서 나갔다고 했다. 그 일대의 비슷한 여인숙을 다 찾아볼 수도 있었지만, 최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후 가끔씩 유씨가 생각날 때면 그저 이곳 북한산 초입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곤 했다. 이것이 휴일 새벽 첫차를 타고 이곳까지 온 최씨의 사연이었다.

장씨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밤 자신이 만났던 여인이 최씨가 말하는 유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씨는 최씨에게 지난 밤의 일을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날은 이제 완전히 밝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마신 술이 꽤 된 탓에 얼굴이 빨개진 두 사람은 상황이 난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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