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14)
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14)
  • 관리자
  • 승인 2010.10.15 10:43
  • 호수 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문로 연재소설
귀신 중에 가장 불쌍한 것이 몽달귀란다. 그믐밤에 숲 언덕을 지나면 바위턱에 웬 사내가 울고 있는데 ‘이보셔, 달도 없는 한밤에 왜 이런 산중에서 울고 계셔?’ 어깨를 두드리면 ‘아, 나 좀 가만 나둬요 좀!’ 뿌리치고 또 혼자 처 울고 자빠졌다는, 남 해코지도 못하는 총각귀신이다.

총각귀신 불쌍한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홀아비 불쌍한 거는 세상이 다 알아주지 않는다. 게다가 다 늙어서 여자 없어 외롭다고 한탄하면, 십중팔구는
‘저 노인네가 노망이 난 게로군.’
이런 반응이다.

사회에서는 노인복지신장을 떠들어 대고 있지만, 실제로 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는 알지 못한다. 물론 밥 굶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겠냐마는,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외로움이다. 밥을 안 먹으면 죽던가 쓰러지니까 사람들로부터 동정이라도 받을 수 있고, 어쩌다 그런 노인이 발견되면 사회 곳곳에서는 호들갑을 떨며 노인복지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니 좀 낫다.

그러나 정작 밥 굶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외로움에 대해서는 좀체 신경 써 주지를 않는다. 장씨같은 홀아비 독거노인이 하루종인 집 안에 우두커니 앉아 TV나 보다가 저녁나절에 오늘 하루 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해거름의 쓸쓸함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장씨같은 홀아비는 몽달귀 못지않은 ‘홀애비 귀신’이다. 사람들은 그저 이 귀신이 문제 일으키지 않고 국으로 조용히 있다가 큰 문제없이 저 세상으로 가기만을 바란다.

그야말로 철창에 가둬놓은 동물원 원숭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나마 원숭이들은 누군가 보러 와주기라도 한다만, 우리는 보러 와 주는 이들조차 없다. 가끔씩 들르는 사회복지사들 빼놓고는 일년 열두달 내내 만나는 이들도 드물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노인네들이 꾸역꾸역 종묘공원으로 모여드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남들은 보기 싫다고 욕을 할 지 몰라도, 당신들이 집안에 우두커니 앉아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은 하루를 보내본 경험이 없다면 비난해선 안 된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몽달귀도 조용히 지 혼자 울고 자빠졌는 못난 귀신이지만, 홀아비 귀신은 그보다 더 불쌍하고 못난 귀신인지 모른다. 이젠 눈물마저 말라버려 감정의 기복조차 크지 않은 무료한 날들이다.

비록 여자는 꽃값에 충실했을 뿐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장씨는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누가 이렇게 자신의 몸을 살뜰하게 닦아주고, 어루만져 주겠는가.

꿈속에서 장씨는 한없이 즐거운 꽃길을 걸었다. 사람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내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이십여년 만에 이틀 연속 여자와 함께 밤을 지냈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려 이십년 동안의 수도자 같은 생활을 마치고 느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지난 이틀 동안 느낀 것이 훨씬 많았다.

“염병할·….”
여태 뭐하고 이리 외롭게 살았던가 회한이 밀려들었다.

예전 같으면 나이 예순이면 이제 죽을 날 받아놨다고 생각했으니, 그닥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일흔 되기 전에 거의 저세상으로 가버리곤 했으니까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같은 것도 별 필요 없었다. 간혹 오래 사는 이들이 있었지만, 또 그런 이들은 그만큼 희귀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떠받들어줬다. 별로 외로운 늙은이들이 많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제 늙은이들이 죽지는 않고 여든이 훌쩍 넘도록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이건 영 못할 노릇이었다. 노인네가 많아지니 그만큼 사회에서 어른 대접받기도 힘들었다. 대접받을 놈이 대접해주는 놈보다 더 많으니 이 일을 어쩔 거냐 말이다.

게다가 예전보다 건강한 노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힘은 넘치고, 일자리에선 예전보다 일찍 떨려나게 되니 그 길고 무료한 시간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시각은 예전이랑 크게 달라지지 않아 젊은이들처럼 행세하려 하면 ‘주책이다’는 반응부터 보이니, 이건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저희들은 안 늙을 줄 아나. 저희들도 늙어 사회에서 ‘왕따’ 한번 당해봐야 이 처절한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게다.

꿈 속에서 장씨는 꽃길을 달리며 오랜시간 억눌려 있던 많은 생각을 아낌없이 얘기했다. 꽃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고, 그 긴 길을 달리며 계속해서 소리 높여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달콤한 꿈은 난데없는 소음으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탕.탕.탕.’
“아저씨, 문 좀 열어봐요!”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