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15)
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15)
  • 관리자
  • 승인 2010.10.22 15:51
  • 호수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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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로 연재소설

설잠 들어 혼몽한 가운데 다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매우 위협적으로 들렸다. 장씨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문 밖의 남자는 더욱 세차게 문을 두들겨 댔다.

“아, 아저씨. 문 좀 열어보라니깐!”
“아, 잠깐 기다리시오!”

장씨는 옷을 꿰입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험악하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이 옆방에 들었던 아저씨 같이 온 사람 맞지? 저 아저씨한테 좀 가 보소!”
“아니, 무슨….”

장씨가 다급하게 옆방으로 들어서자 축 늘어진 최씨가 눈에 들어왔다. 방에 들었던 여자와 관계 중에 갑자기 쓰러졌다고 했다.

‘복상사?’

장씨는 아차 싶었다. 구급차가 오고 구급요원에 의해 최씨는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얼결에 장씨도 함께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씨는 급사는 면했지만, 뇌출혈이 있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중풍이다. 장씨는 병원 응급실에서 담당 의사에게 마치 죄인인양 이런 저런 물음에 답하기 바빴다.

“아침부터 술 드시고, 비아그라 복용하고, 관계를 가지셨단 말씀이죠?”
“아,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먼저 원인이 뭔지부터 알아야 하니깐.”

마치 죄인 취조하듯이 깐깐하게 물어보는 응급실 담당의에게 뭐라 한마디 하고 싶었다. 제가 형사라도 된단 말인가. 훤히 뚫려 있는 응급실에서 언성을 높여 얘기하는 담당 응급의에게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개인적인 사생활을 이렇게 떠벌려도 되는 것인가. 환자가 젊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그 고압적인 자세는 무엇이란 말인가.

장씨는 할 말이 없었다. 응급실 여기저기서 쑥덕대는 것 같은 기분에 화끈거려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위급한 사람을 보고 위로보다 혀나 끌끌 차는 세태가 말할 수 없이 못마땅했다. 늙은이는 응급상황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최씨는 평소 고혈압이 있는데다 음주와 발기부전 치료제, 그리고 갑작스런 성관계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혈압이 급속히 높아져 뇌출혈이 일어났다는 소견이었다.

다행히 빠른 응급조치로 최씨는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한나절이 지나 깨어난 최씨는 말이 어눌했고, 팔다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장씨는 난감했다. 하루 인연이지만,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정없이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지만, 의식이 깨어난 최씨는 한사코 연락을  거부했다.
말이 어눌해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최씨는 장씨에게 신용카드를 건네고,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해달라는 의사표시였다.

장씨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최씨의 보호자 역할을 떠맡게 된 것도 그렇거니와 멀쩡히 가족이 있는 사람을 자신이 떠맡아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러나 신용카드와 비밀번호까지 알려줘 가면서 장씨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최씨를 또한 모른척할 수도 없었다. 뭔가 사정이 있겠다 싶었다.
결국 장씨는 응급실에서 최씨의 곁을 지켰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그날 밤이 돼도 최씨의 휴대전화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장씨야 집에 들어가 봐야 반길 이 없는 단신이지만, 가족이 있는 사람이 새벽에 나가 밤을 이슥하도록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장씨는 최씨가 단순히 부끄러움 때문에 집에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슨 사정이 있겠다 싶었다.

그날, 응급실에서 최씨의 곁을 지키며 장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많은 생각을 했다. 어제와 오늘 이틀간에 일어난 일들은 살아오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특이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생전 마음만 품었을 뿐 직접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던 오입을 해 본 것도 그렇거니와, 이렇게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루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런 깊은 관계로 엮이게 될 줄 누가 알았던가.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면 그 뿐이지만, 장씨는 그렇게 일어나서는 안될 것 같다는 도의적인 책임감이 들었다.

최씨가 장씨에게 맡긴 신용카드의 잔액을 확인해 본 결과 꽤 많은 액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병원비는 물론이거니와 그 정도의 돈이라면 장씨처럼 없는 사람에게라면 만져보기 힘든 큰 돈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돈을 최씨는 장씨에게 맡겼다. 그 믿음만으로도 장씨는 최씨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누가 가진 것 없는 중늙은이를 이처럼 믿어주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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