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 (16)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그대품에 잠들었으면 (16)
  • 관리자
  • 승인 2010.10.29 15:44
  • 호수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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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최씨의 가족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엉겁결에 맡게 된 역할이었지만, 장씨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 터에 매일같이 갈 곳이 있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왜 그렇게 거리나 공원을 배회하면서 할 일 없는 일상에 지쳤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할 일을 찾아 뭐라도 했다면 그 끔직한 무료함에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보수가 있다면야 더 좋겠지만, 보수가 없더라도 단지 내가 하는 일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봉사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그렇게 남을 위해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런 일을 맡을만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다못해 같은 노인들끼리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본다던가, 더 어려운 또래 노인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장씨는 하루 종일 병원에서 최씨를 간호하다 보니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최씨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최씨는 증세가 빠르게 호전돼 일주일이 지날 즈음에는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언어능력도 거의 돌아왔다. 다리 한쪽을 절긴했지만 거동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됐다. 담당 의사들은 이처럼 빠른 차도를 보이는 것은 친구가 빨리 조치를 취한 덕분이라며 장씨를 치켜세웠고, 최씨는 장씨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사람이란, 꼭 복잡한 관계로 얽혀야 만이 돈독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다가다 만난 인연으로도 평생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부부의 연을 맺기도 한다. 이를 두고 ‘인연’(因緣)이라고 하지 않는가.

일주일이나 붙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으니 어지간한 살아온 이야기들은 거의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장씨가 이리저리 돌려 물어봐도 최씨가 한사코 피하는 이야기가 바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씨의 부인이 최씨를 찾은 것은 거의 퇴원이 임박해서였다. 한 달여 병원생활을 마치고, 통원하면서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게 되면 대부분의 운동능력이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날이었다.

“꼴좋소.”

한 달이 다 돼 병실을 찾은 최씨의 부인이 뱉은 첫 마디 말이었다.

최씨는 부인을 외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래 다방 레지년 찾는다고 싸돌아다니더니만, 고작 이 꼴이요? 젊어서는 젊은 혈기에 그렇다 쳐도 이제 이 늙마에 이 무슨 해괴한 짓거리란 말이요? 세상 사람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아요?”
최씨는 마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모로 돌려 부인을 외면하고 있었다. 최씨의 부인은 반은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높이다가, 최씨를 잡고 패악질을 부리다가 제풀에 지쳤다. 근 30분을 드잡이하는 품이 강짜가 보통이 아닌듯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었다 해도 환자한테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장씨가 최씨의 부인을 말려도 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아저씨는 좀 빠지씨요. 어디서 친구냐고 이딴 것들하고 어울려서는. 체신머리 없이.”

최씨의 부인은 교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씨는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남의 집안일 사정도 잘 모르는 터에 뭐라 끼어들 게재가 아닌 듯싶어 국으로 가만히 있었다.

최씨의 부인은 그렇게 한참 소란을 피우다가는 휑하니 돌아가 버렸다. 아무리 분하더라도 부부의 정이라면 먼저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 옷가지 등은 챙겨 입었느냐 살펴 볼 만도 한데, 이건 숫제 집 나간 하인 나무라듯이 닦달만 하고는 나가버렸다.

한참을 고개를 돌리고 있던 최씨가 부인이 나가자 자리를 고쳐 일어나 앉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미안하게 됐소. 못난 꼴 보여서.”
“아니,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어찌 저렇게….”
“그동안 남우세스러워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산 게 몇 십년이오.”

장씨는 최씨의 부인이 ‘다방레지년’ 운운하며 패악질을 부릴 때부터 그 여인 때문이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했다.

최씨는 그동안 감춰뒀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순탄하게 살았을 것 같은 화이트칼라 늙은 신사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던가. 장씨는 ‘사람살이가 꼭 겉으로 보이는 것만은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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