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그대품에 잠들었으면(19)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그대품에 잠들었으면(19)
  • 관리자
  • 승인 2010.11.19 16:04
  • 호수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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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더 살기가 싫었다. 어차피 부인이나 아이들은 자신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작 최씨는 죽기로 마음을 정하자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했다가 닥칠 상황에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죽기로 마음을 먹자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최씨는 일주일간을 고민하고 집에서 나왔다. 회사에 들러 조기퇴직을 신청하자 제법 큰돈이 퇴직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여행을 떠났다. 혼자서 한달여를 돌아다니자 점점 생각은 명확해졌다.
‘앞으로 삼십년을 이렇게 사느니, 삼년을 내 맘대로 살자.’
생각이 정리된 최씨는 종로로 향했다. 근처 여관에 장기숙박할 방을 정해놓고 유씨의 다방에서 매일같이 앉아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있었고, 신문을 보기도 했으며, 글을 쓰기도 했다. 무료하고 따분할 것 같은 일상이었지만, 최씨는 만족했다. 돈이 다할 때까지만 살 작정이었다. 돈은 충분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석달을 다방에 드나들었다. 물론 다방에서는 최씨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근처 여관방에서 산다는 것도 몰랐고, 그저 명퇴당한 한 인텔리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방에서 빙빙 도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떻게 보이던지 상관없었다. 그냥 최씨는 만족했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흡사 야반도주 하듯이 하루아침에 다방을 정리하고 유씨는 사라졌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오래된 경영난에 문을 닫은 것이라고 하지만, 최씨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그렇던들 어떻게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미치겠는 심정에 최씨는 유씨를 찾아 나섰다. 유씨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최씨는 유씨와 친했다는 같은 건물의 꽃집 아낙에게 비로소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아유, 아저씨도 둔하시긴…. 유 언니가 아저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요? 아저씨 오는 시간이면 일부러 앉는 자리 사람도 안 받고 볼일 있어도 나가지도 않았다구요.”
“설마, 그럴 리가. 유씨는 내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는데.”
“어디 남자들처럼 제 속내 다 말하고, 감정 생기는 대로 다 지르는 게 여자인줄로 알아요?”
그랬다. 최씨가 지금까지 만나봤던 여자는 부인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여자를 알 턱이 없었다. 부인은 자기 감정을 손톱만큼도 숨기지 않는 여자였다. 꽃집 여자는 말을 이었다.
“사실, 그 다방 정리했어도 진작에 정리했어야 했다구요. 요즘 다방이 가당키나 해요? 종로삼가 이 비싼 임대료에 번쩍번쩍하는 커피숍들이 즐비한 마당에.”
“그럼 적자를 보면서도 가게를 계속 열었던 게….”
“에휴, 말해 뭐할까. 남자들이란 다 이렇지. 그 언니, 진짜 아저씨 좋아했어요. 돈이야 그렇다 쳐도 그 아줌마 와서 난리 치기 전까진 어떻게 버텨보나 했는데, 결국 그 아줌마 들어와서 난리를 치니깐 더 버티지 못한 거지.”
어떻게 알았는지 부인이 다방에 찾아왔다고 했다. 시점을 따져보자면 최씨가 근처에 방을 얻어두고 다방에 드나들기 시작한지 두어달 쯤 됐을 때였다.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씩씩거리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최씨를 발견하지 못한 부인은 카운터에 있던 유씨를 보고는 달겨들었다.
“오라, 당신이 여기 주인이요?”
“맞는데요, 무슨….”
말이 필요 없었다. 거대한 몸집을 두르고 있던 모피 망토가 펄럭이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유씨의 머리채를 잡아채 카운터 밖으로 끌어냈다.
“네년 가랑이 붙잡고 있느라 나는 소 닭 보듯 하고, 기어이 집을 나갔다 이거지? 이 놈팽이 어딨어!”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건물 전체를 들썩였다 한다.  꽃집 여자는 말을 이었다.
“아니, 진짜로 몰랐단 말이에요? 그 사단이 나고도 한 달을 더 장사를 했는데?”
최씨는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때려 죽이고픈 충동이 일었다. 외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산을 축낸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다방에 와서 차 한잔씩 마시고 가는 작고 소소한 일상마저도 부인은 용납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유씨는 아무런 잘못도 없음에도 그 모욕을 받고 그길로 사라져 버렸다. ‘회한’이란 이런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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