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나 벌초를 위해 산을 찾았다가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많다. 산세가 괜찮다 싶으면 산마다 비뚤어진 경조사상(敬祖思想)으로 난리다.
왕릉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커다란 봉분, 값비싼 비석과 상석으로 장식한 묘소들이 저마다 위용을 자랑한다. 납골당도 요란하다.
조상에 대한 과거 기록을 날조하여 부풀리는 인플레이션 현상도 심각하다. 비석이나 상석에 무슨 고위직에 있었던 것처럼 꾸며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비석과 상석 내용을 보고 어떤 문중들은 그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정리하는 데 애로를 겪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후에 추증(追贈)하여 족보에 올리는 일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다 하고 이제야 그럴싸한 비석을 세워 기리는 웃지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학생(學生)이라고 해야 할 것을 처사(處士)라고 기록한 경우다. 처사란 벼슬하는 것을 단념하고 초야에서 묻혀 살았던 선비를 점잖게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학생이라 해도 점잖은 유가적 전통 가문의 위신이 깎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방에도 학생이라 하지 않고 현고처사(顯考處士) 운운한다는 말도 있다. 사가 도사, 법사, 거사 같은 반열에 드는 것도 아니거니와, 유가 제례에도 그런 법은 없다.
4대조나 5대조쯤의 조상의 묘를 새로 꾸미면서 상석이나 비석에 무슨 벼슬자리를 한 것처럼 기록하는 오류도 보인다. 물론 허위다. 20년을 한 세대로 보았을 때 지금 나이가 일흔 살(1936년생) 정도 되는 노인의 4대조나 5대조라면 1850년생 정도 된다.
그가 60세에 죽었다면 1910년에 죽은 셈이 된다. 동학란, 갑신정변, 한일병합 등의 전변하는 시대를 살았다고 해도 이제 와서 비석을 세워 그 벼슬을 과시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웬만한 가문이라면 진작 갓머리 쓴 비석 하나쯤은 세워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상의 학덕이 훌륭하고 위세가 등등했다는 것은 후손으로서 좋은 일이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교적인 문화가 꽃피워졌기 때문에 훌륭한 유학, 선비, 처사여야만 후손으로 명예로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연한 조상의 경력이나 삶을 날조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크고 높고, 넓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물량위주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풍조를 개탄한다. 서양 사람들처럼 우리나라도 농부면 농부, 역관이면 역관, 양반이면 양반, 상인이면 상인 등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내실이 있게 살았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인품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신망을 기준으로 그 일생이 성공적이었는지를 가늠하고 그것을 명예롭게 여기는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
조상을 날조하는 것은 죽은 조상의 유골에 옷을 입히고, 분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조상을 욕되게 할 뿐이다.
중추가절이다. 또 한 번 추석을 보내며 산하의 조상 앞에 옷깃을 여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