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그대품에 잠들었으면(21)
[서문로 연재소설 노수별곡(老手別曲)] 그대품에 잠들었으면(21)
  • 관리자
  • 승인 2010.12.04 09:45
  • 호수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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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본인이 싫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말없이 술 몇 잔을 더 나눠 마신 뒤 장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씨 전화번호에요. 혹시나 싶어 아직도 종로삼가의 여관에 묵고 있소. 생각이 바뀐다면 전화 한번 해 봐요.”

돌아오는 길은 착잡했다. 최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평생을 남의 기분만 맞춰주고 살아온 삶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니 남을 탓할 수도 없었고, 최씨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의 틀을 깰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늦게나마 만난 여인을 향해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릴 용기도 없던 사람. 최씨는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여운 자화상이었다.

장씨는 최씨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울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도 사랑 한번 해 봤으면 좋겠소.”
‘사랑.’

그 말이 오래도록 장씨의 가슴에서 울렸다. 이성을 만나 몸을 섞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며 사는 데 전력투구를 해왔던 우리네 또래의 뒤늦은 회한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런 감정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일생에 그런 감정의 사치 한번 누려보지 못하고 죽는 게 과연 더 나은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유씨는 장씨가 전해주고 간 전화번호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흐릿한 시야에서 번호는 뿌옇게 퍼져보였다. 고개를 떨군 유씨 앞에 놓인 막걸리 잔에 맑은 술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제야 흐릿하게 보였던 번호가 또렷이 보였다.

번호 하나하나에 최씨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오랜 세월 만나온 사람도 아니었고, 같이 그 흔한 데이트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씨는 처음 최씨를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늙으면 감정이 무뎌진다고 하는데, 최씨를 만난 그 순간은 전혀 무뎌지지 않은 감정이 솟아올랐고, 마치 처녀 적 품었던 설레임까지 느꼈던 것이다. 최씨는 유씨가 동경해 왔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유씨가 만나왔던 남자들은 모두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었다. 간이라도 빼줄 듯 잘해주던 남자들.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자기 자랑에, 자기와 상관없는 배경 자랑에 남자다움을 과시하던 사람들. 그때는 몰랐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사람일수록 실은 속 빈 강정인 경우가 많으며, 자신에게 잘해주려고 애써 포장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이 유씨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최씨는 달랐다. 애써 자신을 과장하지도 않았고, 유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항상 같은 자리에서 유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다 가곤 했었다. 유씨도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씨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더 나은 관계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냥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가게를 억지로 끌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최씨의 아내가 들이닥쳐 한바탕 난동을 부리자, 더는 다방을 지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최씨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씨는 최씨를 피해 더 숨어버렸다. 자신의 마음에 오래도록 감춰놓고 감춰놨던 곶감을 천천히 녹여먹듯, 마음속에서 좋았던 감정을 오래 지속하고 싶었다.

그런데, 우연히 장씨를 만나 최씨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 듣자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가라앉아 맑은 술이 뜬 막걸리 잔에 눈물이 떨어지자,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술잔에 동요가 생겼다. 유씨는 전화를 꺼내들어 망설임 없이 전화번호를 눌렀다. 막상 전화번호는 거침없이 눌렀지만, 전화신호가 가는 동안 점점 흥분되는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나중에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전화신호가 끝까지 다 울려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최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가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흥분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비로소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다.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자신이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만으로 유씨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했는데, 다음순간 전화기를 손에 꼭 쥐고 있던 유씨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땀에 흥건하게 젖은 전화기의 진동이 온 몸을 타고 와 유씨의 눈꺼풀을 떨리게 했다.

전화기 창에 뜬 번호는 방금 전 자신이 눌렀던 번호였다. 진동이 계속되면서 다시 유씨의 마음은 터질 듯 방망이질 쳤다.

“여보세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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