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①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①
  • 관리자
  • 승인 2006.10.2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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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으로 충만한 마음가짐 절제된 생활로 승화

이번 호부터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을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종교나 정파적인 입장이 독자마다 다르고 호불호도 있을 수 있지만 본 시리즈에 소개하는 우리 사회의 덕망이 있는 지도자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인적 자산입니다.

 

지도자들의 세상에 대한 마음가짐, 섭생, 일상의 행복 등을 살펴봄으로써 노년세대와 노후를 준비하는 세대 모두에게 건강과 장수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시리즈 첫 번째로 천주교의 최고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 편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지만 노년세대를 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의 ‘건강 노년·문화 노년’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병로 대기자(작가)〉

※사진출처: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실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종교인, 학자, 예술가, 정치인, 기업인 등이 대체로 오래 산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천주교의 최고 어른.

 

장수하는 사람들이 종사하는 직업군 중에서 맨 첫 번째로 꼽히는 종교인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85세(1922년생)이니 본 특별기획 시리즈에 첫 번째로 올리는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의 요건에 정확히 부합된다.


지난 10월 18일 혜화동 주교관 집무실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소탈한 평상복을 입고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맞는 김 추기경은 건강해 보였다. 왼쪽 귀가 약간 어두울 뿐 인터뷰 내내 소파 등받이에 거의 기대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대화할 정도였다.

 

자서전이나 각종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거니와 김 추기경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건강체질이라고 했다. 김 추기경은 “소년기 때 한 번 축농증 수술을 위해 입원한 것을 제외하면 노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큰 병을 앓은 적이 없어요”라며 “요즘 병원에 몇 번 갔지만 소화기 문제이고…. 그 외에는 건강한 편이에요”라고 했다.

 

  교구장좌 착좌(1968).

 

종교인이 오래 산다는 것은 웬만한 의학상식이나 건강상식만 있어도 알 수 있다. 건강하고 장수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너무 많다.

 

신앙심으로 충만한 마음가짐, 절제되고 규칙적인 생활패턴 만으로도 성직자들이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

 

서너 살 적 유아기, 초등학교 소년기, 청년기, 성직자가 된 뒤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 권의 공책에 한 날 쓴 일기들처럼 초지일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큰 성자로, 세계천주교사에 이름을 올리는 재목으로 자라나는 기나긴 과정이 장수하기에 알맞아 보인다는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엮은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에 보면 김 추기경은 세 살 무렵의 일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매체에 기고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살펴보자.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나는 것 중에 가장 오랜 것은 내가 세네 살 때 국화빵 기계에 빵을 굽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당시 우리는 경북 선산읍에 살았는데, 읍내 공터에서 곡마단인가 신파극인가가 벌어지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구경꾼들을 상대로 빵을 굽고 계셨다.”

 

세살 적의 어머니 기억


같은 책에 다섯 살 때의 일을 기억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쩌면 그때 벌써 성직자로서의 성정이 자라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이런 성정은 성직자들이 장수하는 비결 중의 하나.


“어머니가 옹기를 팔기 위해 먼 장에 갔다가, 해질녘까지 돌아오지 않으시면 어둑어둑해 가는 빈 집에 혼자 있기가 너무나 적적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한길에 나가 어머니가 오실 신작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때 석양에 물든 그 산이 어린 내 마음을 말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였다.”

 

  사제 서품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1951).


이때의 기억은 다른 지면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1969년, 추기경에 서임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조선일보 정운성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과연 저 빛나는 노을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기자는 이 사실을 시적인 여운을 깔고 한 말로 이해한 듯 싶다. 범접하기 어려운 ‘추기경 전하’임에도 실은 문학청년 같고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아름다운 성정이 있다고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김 추기경은 중학교 시절에는 시도 곧잘 썼었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일면들에서 인간적인 면 보다는 김 추기경의 성자로서의 면모를 본다. 이 기사는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구중서 엮음)에 수록돼 있는데, 이 책의 여러 인터뷰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성자로서의 면모를 발견할 수가 있다.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들을 읽다보면 나중에 아시아에서 최초이고, 당시 추기경 중에서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큰 재목이 되게 하기 위한 어떤 섭리, 혹은 치밀한 계획 하에 길러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옹기장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잣집 아들 못지않게 귀하게, 여느 규모 있는 가문의 자제보다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이러한 환경은 후천적일까, 아니면 운명적일까.


신앙심이 없는 보통사람의 눈에도 다분히 운명적으로 보인다. 김 추기경의 부친은 충청도 태생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7살 때 작고했으니 그 기억이 가물가물할 터인데, 김 추기경은 아버지의 일도 기억하고 있다.

 

충청도 억양으로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와 그 말투를 동네사람이 흉내 내며 웃던 기억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부친이 실은 한국 천주교 순교사에 있어 산 증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에서 김 추기경은 이렇게 적고 있다.


“충남 연산이 고향이고 본관이 광산(光山)인 내 할아버지 보현공(甫鉉公)은 독실한 신자로 병인교난(丙寅敎難, 1866~1868)때 순교하셨고, 아버지는 그분의 유복자였다.”


병인교난은 조선 고종 3년에 8000여명의 가톨릭 신자가 목숨을 잃었던 우리나라 최대의 가톨릭교도 박해사건. 이때 김 추기경의 할머니도 함께 체포되었으나 당시 국법에 임신부를 사형시키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목숨을 건졌다.


가문이 그랬던 만큼 김 추기경의 부친도 삶이 순탄하지 못했다. 박해받던 천주교 신도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옹기장수로 변신해 전전했다. 그러던 중 김 추기경의 어머니인 대구 출신의 달성  서씨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8남매를 보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8남매의 막내.

 

명문 자제 못지않게 엄하고 귀히 자라

 

김 추기경은 어릴 적에 보았던 어머니의 신앙심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매일 한참씩 긴 기도를 하셨고 나는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졸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 기도를 바쳤다”는 것. 성서나 성인의 이야기를 읽어주거나 효자전을 읽어줄 때면 감명 깊게 들었다고 도 한다.

 

김 추기경은 어머니에 대한 글에서 “잘못했을 때 매를 만들어서 어머니를 주며 종아리를 드러내고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때려주십시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김 추기경의 어머니는 직접 매를 든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교육도 엄격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었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어서 자식들 교육에도 그만큼 엄격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고 그 때문에 내 위의 형과 나, 우리 어린 형제를 더욱 엄하게 키우셨다.”

 

  일본 상지대 유학시절. 왼쪽은 임 철(1941~1943).

 

김 추기경은 어머니와 관련된 글에서 명을 거스르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도 말한다. 또 거짓말도 못했고, 욕 같은 상스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김 추기경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조성한 환경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런 어렸을 때의 성장환경이 후일 성직에 나가는 자양분이 됐을까  김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경우는 거의 어렸을 때 있었던 것이 성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제일 중요한 것을 어머님의 가르침을 통해 받고 평생을 하느님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나의 삶으로 이어져 왔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엄했던 대신 보상도 했던 것 같다. 김 추기경 스스로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일 굶을 것 같을 때는 있었어도 한번도 굶어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의 인터뷰나, 기고문을 보면 김 추기경이 배가 고파서 고생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 늘 초가삼간에 살았으면서도 언제나 집이 깨끗이 도배가 돼 있었다고 한다. 봄과 가을이면 신부들이 시골 신자들을 방문하는데, 그 신부들을 맞이하기 위해 도배를 했기 때문이었다.

 

밥도 좋은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잡곡이 약간 섞인 쌀밥으로 동년배 사람들이 시골에서 먹는 밥에 비하면 아주 행복한 밥상을 받았던 것 같다. 김 추기경은 기고문이나 인터뷰에서 지금도 그것이 신기하게 여겨진다고 회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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