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말] 유적을 남기자!
[남기고 싶은 말] 유적을 남기자!
  • 관리자
  • 승인 2006.10.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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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열-경원대 사회체육대학원장(전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농구감독으로서 명승부를 많이 지켜본 셈이지만 그래도 특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게임이 있다.

 

우리 팀 시합이 아닌 제3자의 게임을 관전하면서 갈등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은데,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게임이 바로 이 흔치 않은 남남끼리의 대결이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1973년 8월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남자농구 최종결승전 미·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미국은 그해 바로 1년 전인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소련에 분패, 농구왕국의 지위를 빼앗긴 울분을 새기고 있었다.

 

 

그 탓인지 두 라이벌의 대결은 박진감이 넘쳐흘렀다. 숨 막히는 시소의 연속으로 그야말로 스릴과 서스펜스가 충만했다.

 

농구 대회서 소련 물리친 미국 선수들 바스켓 그물 잘라 목에 걸어

필자도 여러 시합에서 한 점차 승부를 경험했기 때문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미국이 이긴 뒤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다.

 

망연자실하는 소련 팀과 소련 관중들과는 다르게 환호하며 기뻐하던 미국 팀은, 선수들이 코치를 목마 태우고 미국 측 골대 밑으로 쇄도했다.

 

이어 코치가 링에 연결된 바스켓 그물을 가위로 한 올 자르자 다른 선수들도 한 사람씩 목마 탄 채 차례로 그물을 자르기 시작했다.

 

보통 골대 링과 연결되는 그물 올은 8~10개 정도인데, 그 부분을 모두 잘라 내더니 바스켓 그물을 차례로 한 번씩 목에 걸고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랐던 소련 관중들은 미국 선수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일제히 소리를 질러대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좋지만 그물을 자르는 것은 자본주의식 낭비가 아니냐는 뜻이었다.


미국 선수들이 목마 탄 채 그물을 자른 행위는 물론 낭비일 수 있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한 미국 선수들이 이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무엇인가 남기려는 것이었음을 알았다. 미국의 유수 체육관은 이런 기념비적인 유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우리가 승자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물론 승리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감독이나 코치를 헹가래쳤을 것이다.

 

그리고 메달을 목에 건 채 금의환향해 가두퍼레이드와 축하파티를 벌이고…. 그렇게 온 국민이 환호하다가 금세 승리를 잊어버린다. 개인이 소장한 색 바랜 사진 몇 장 외에는 남기는 게 거의 없다.


기록 보존에 대한 무관심은 비단 농구계나 체육계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5000년 유구한 역사만 자랑했을 뿐 현재가 먼 훗날 5000년 뒤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기록 보존 능력의 결핍을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던 당시의 시행착오에서 쓰라리게 경험해야 했다. 컴퓨터에 입력할 만한 자료가 없어 그냥 세워둔 채 허송해야만 했다.


지금은 다소 귀찮더라도 모든 것을 기록 보존만 해두면 그 역사는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더욱이 승리나 영광의 역사는 쉬 자만과 허세에 빠져들어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길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한순간의 영광은 1년 내내 피땀 어린 훈련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게 하고, 그래서 그 다음은 쉽게 허물어지는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알고 있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 미국 체육관엔 이런 유물로 가득

승리의 참뜻이 자만이 아니기 위해서 또 후배들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는 하찮은( ) 농구 망 하나라도 남겨 두어야 한다.


미국 선수들이 그물을 자르던 모습이 더욱 새삼스러운 것은 서울시가 고층 청사를 나사 모양으로 새롭게 설계해 2009년 선보인다는 보도를 접해서다.


서울시 청사가 일정 때 일인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현재 1000만명이 넘는 서울시민의 행정업무를 처리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공간이다.

 

그래서 일제의 잔해도 없애고, 우리의 자본과 첨단 건축기술로 나사 형 고층건물을 새로 건립하자는 취지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이쯤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일제 잔해를 없애는 것도 좋지만 그 건물이 후손들에게 교육적 가치를 제공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시청사 주위에는 고궁(덕수궁)을 비롯해 러시아 초대 대사관이었던 옛 상공회의소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도심의 고풍을 자랑하는 명소이기도 하다.

 

과연 초현대식 고층건물이 이 곳에 들어설 경우 어떤 모습으로 균형을 유지할지 유념해야 한다.


가지고 있는 역사의 기록이나 유물을 충분히 보관해서 승리는 승리대로 패배는 패배대로 무엇인가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도록 한 번 더 채찍질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 훗날이 되면 싫어도 우리가 곧 역사의 한 주인공이 되어야 할 날이 올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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