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壽 & 白首 - 완고함에는 뿌리가 있다
白壽 & 白首 - 완고함에는 뿌리가 있다
  • super
  • 승인 2006.08.1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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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본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다.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든 영화인만큼 미덕도 많고 뒷얘기도 많이 남겼다.

 

주연 형제 역을 맡았던 배우들은 이 영화를 통해 더욱 유명해져서 한류 붐을 일으키며 한국이라는 국가적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있다.

 

한국 영화사상 가장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라는 점도 흥밋거리였다. 할리우드 대작영화 못지않게 전쟁(특히 한국전)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했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주인공의 동생에 대한 헌신적 사랑은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반공의식 같은 이데올로기에 구애되지 않고 오직 동생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전쟁에 뛰어들어 무공훈장을 받을 정도로 싸웠으나, 동생을 찾기 위해서 인민군이 되고 복수심(오해였으나)으로 국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다가 동생을 만나지 못한 채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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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영화로서 이렇게 주인공을 이념의 지향이 없는 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2005년 최다관객영화 ‘웰컴투 동막골’도 6·25 전쟁 기간 동안 아무런 이념적 지향이 없이 사는 우리나라 안의 가상 마을 사람들을 그린 영화다. 동막골의 이데올로기를 굳이 찾자면 이 마을 촌장 노인이 하는 말처럼 ‘뭘 많이 멕여야지’ 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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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이 한마디는 2006년 신년 정계에서 말깨나 하는 이들이 많이 인용했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옛 소련의 미하일 솔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은 코사크족 기병의 전쟁과 사랑 이야기다. 코사크족은 원래 너무 용맹하여 러시아 황실에 위협이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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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실에서 멀리 떨어진 돈강 유역을 하사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필요할 때 징집할 수 있는 비정규근위군 지위를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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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인공은 그런 자부심이 강한 코사크족 중농 출신의 청년으로 아무런 이념의 지향이 없이 러시아 10월 혁명 후에 벌어진 적군(赤軍)과 백위군(白衛軍) 간의 내전에 참전한다.


이념의 지향이 없다는 것은 주인공이 러시아혁명 이데올로기와는 관련이 없는 완고한 코사크 기병으로서 전쟁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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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나 공산주의 어느 한 쪽을 위해 복무한 것이 아니라 코사크인으로 생존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고 최후를 맞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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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비견될 만큼 스케일이 큰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옛 소련 공산주의 시대에 쓰여졌음에도 러시아혁명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코사크인의 입장에서 공산주의혁명 과정의 진행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평가할 만하다.


백과사전에 이르기로는 소수의 빈농층과 귀족층이 적군과 백위군 편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을 뿐, 러시아혁명 당시 대부분의 코사크족은 중립을 지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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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지향이 없이 힘의 우위에 따라 유연하게 처신했다는 얘기다. 왜곡된 정보인지 모르나, 이 경우 회색분자로 몰려서 적보다 더한 공격을 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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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민족의 생존을 위한 선택으로서는 그래도 중립이 안전하다. 전쟁을 하는 양쪽 편에서는 그것만도 고마울 수 있기 때문이다.


대 격변이나 전쟁 시기에 어느 한 쪽 편에 섰다가 곤경에 처한 경우는 인류사에 부지기수로 많다. 대표적인 것이 서기 135년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유대민족이다. 그때 로마제국에 호되게 진압되고 나서 뿔뿔이 흩어져 거의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아왔다.


우리 민족의 경우, 조선조 인조의 명나라 편들기를 꼽을 수 있다. 인조반정으로 득세한 완고한 대신들 탓이지만, 중국에서의 청나라의 위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명나라에 붙어 공격하기까지 하다 청나라 태종의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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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으나 결국 삼전도에 내려와 머리를 땅에 짓찧으며 항복했다. 쾅쾅 소리가 안 난다고 몇 번이나 다시 땅에 머리를 찧으라고 하여 피가 낭자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말기인 19세기 후반에 한반도는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청나라 등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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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민비를 중심으로 한 일파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는다. 나름대로 현명하게 등거리 외교를 하며 조선을 바로 세워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비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을미년에 시해를 당하고 말았다. 제거대상 1호가 될 만큼 민비가 똑똑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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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2년 뒤인 1997년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고, 1904년에 일본군이 용산에 진주하는 등 일련의 수순을 거쳐 1910년 일제 식민지가 되기에 이른다.


일제 식민지가 되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 대부분은 중립적이었을까? 젊은 학생들은 인터넷에 그런 물음을 던진다. 합리주의, 과학, 기독교 등 서구 문화 혜택을 받고 자라난 세대여서 답이 논리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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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수립으로 더 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니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외교력으로 남미와 유럽 일부국가에 그런 식으로 왜곡한 내용을 교과서에 싣도록 선전하기도 했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해 대다수 민중이 중립적일 수는 없었다. 유교적 가치관과 한민족 전통문화가 몸에 배 있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중립적으로 볼래야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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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간 지속된 중국과의 관계는 조공을 바치는 수준에서 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베트남이나 만주 등과 같이 중국 변방의 다른 나라 민족은 접근성이 용이하고 물산이 풍족하여 직접적인 통치를 했으나 한반도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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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민족성이 강해서 직접 다스리기 쉽지 않았다. 또 한민족과 전쟁을 하다가 중국 왕조가 바뀐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한사군인 낙랑군을 철수한 이래 중국은 한반도를 직접 통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제는 직접적인 식민지지배를 기도했다. 먼저 군대를 주둔시키고, 강제적으로 합병을 하고, 총독, 도지사, 군수 등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파견하여 통치하려고 한 것이다. 이 상황은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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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어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렸으나 마음속에는 중립을 훨씬 넘는 완고한 의식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속국의식이 아니라 민족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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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제 식민정책에 휘둘리고 수탈당하면서도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유지해 나갔다. 양력 설,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강요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악착같이 음력설을 쇠고, 족보를 만들어 가문을 지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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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설의 경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시대에도 듣지 않았다. 전통 풍습을 지키려는 것은 젊은이들의 기준으로 보면 사소한 완고함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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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완고함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국력이 약해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잃은 입장에서는 그것도 유력한 저항이었다. 고유의 전통문화를 완고하게 지켜왔던 그 힘으로 8·15 해방 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강대국의 힘의 무서움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혈기를 앞세우고 체제나 이데올로기 같은 큰 싸움에 목숨을 건다. 시니어세대는 알기 때문에 풀잎처럼 대세를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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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전통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19세기 말 단발령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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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머리 깎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닌데 최익현, 황현 등 의절들은 목숨을 걸 정도로 흥분했었다. 호주제 폐지나 동성동본 혼인 등 오늘날 노인들이 완고하게 반대하는 사안들도 시간이 흘러 그와 같이 대단치 않은 전통풍습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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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그 사소한 완고함이 나라의 등뼈가 된다.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아시아권의 유력한 국가로 부상하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도 중요하지만, 노년 세대의 완고함은 한민족다운 무늬를 형성하게 하면서 국가적 경쟁력을 강화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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