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②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김수환 추기경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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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0.27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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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렴으로 죽음직전 ‘견진성사’ 은혜로 새 생명 받아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을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종교나 정파적인 입장이 독자마다 다르고 호불호도 있을 수 있지만 본 시리즈에 소개하는 우리 사회의 덕망이 있는 지도자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인적 자산입니다. 지도자들의 세상에 대한 마음가짐, 섭생, 일상의 행복 등을 살펴봄으로써 노년세대와 노후를 준비하는 세대 모두에게 건강과 장수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수하는 한국의 지도자들’ 시리즈 첫 번째로 천주교의 최고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 편을 4회 연속 게재합니다. 김 추기경께서는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고 있지만 노년세대를 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의 ‘건강 노년·문화 노년’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병로 대기자(작가)〉
                                                               ※사진제공:한국교회사 연구소


  우리 밀 회원 모집을 위한 시민 시식회(명동성당, 1993)

 

식구 많은 집의 막내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자랐다. 스스로 밝힌 대로 공부를 열심히 한 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난꾸러기였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어머니 슬하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여러 면에서 남달랐다. 우선 가계의 이력이 특이하다. 박해받은 가톨릭교도 집안의 아들이라는 점이 그렇고, 아버지가 병인교난 당시 유복자로 뱃속에 있었다는 점이 또한 범상치 않다.


이런 가계력 때문에 김 추기경은 어머니로부터 각별한 교육을 받고, 어떻게 보면 훗날 추기경이 될 재목으로 길러진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이 구술하고 평화신문이 펴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형(김동한 신부)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대구 친정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불러 앉히고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김 추기경의 어머니가 대구 시내에서 장엄한 사제 서품식 광경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한 것 같다고 김 추기경은 말했다. ‘내일 아침 끼니거리를 걱정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굶지 않았다’고 한 김 추기경의 말과 통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였으므로 자식들을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해서 튼튼하고 반듯하게 기르겠다는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작용했으리라는 얘기다. 사제가 되기 전에 이미 영양과 체력 면에서 기초를 다졌음을 알 수 있다. 


김 추기경의 유년시절이나 소년시절에 체력은 어땠을까. 김 추기경 연배의 대한민국 남성 평균보다는 체격조건이 좋았다. 추기경에 서임된 1969년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키는 172센티미터였고 몸무게는 65킬로그램이었다.

 

당시 40대 후반의 같은 연령대 남성들을 기준으로 보면 훤칠하고 체중도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적당했다.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어머님 말씀 아직도…

체격이 좋으니 어려서 한번쯤 다른 사람과 시비가 붙거나 치고받고 싸웠을 법도 하다. 싸움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지만 체력이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고 김 추기경은 말했다.


“멱살을 잡고 싸운 일은 없고… 나와 동갑인데 생일은 나보다 몇 달 앞서는 조카가 있었어요. 늘 나와 같이 학교에 다니는데, 한번은 무슨 일인가로 말다툼을 한 적이 있어요. 조카가 나를… 말하자면 아제(아저씨) 대접을 안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얘를 지금 당할 때 이겨야 된다. 안 그러면 계속 얕잡힐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멱살 잡고 한바탕 했더니 내가 위에 있었어요. 그 외에는 누구와도 멱살 잡고 싸운 일이 없어요.”

 

  동성상업학교 재학시절(오른쪽 두번 째가 김 추기경).

 

온화한 성정의 바른 소년이었으나 작심을 하면 또래와의 싸움에서 상대를 제압할 정도의 체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김 추기경이 강한 체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를 보자.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칠 때쯤 군위에서 대구까지 130리 길을 걸어간 얘기다. 


“어차피 조만간 학교를 그만두고 대구로 옮길 테고, 어머니도 보고 싶고 해서 형한테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를 타고 다니셨다. 혹시나 해서 마차와 마주칠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배가 고파서 5전을 내고 떡을 샀는데 그걸 다 먹지 못해 손에 들고 뚜벅뚜벅 걸었다.”


제일 큰형이 ‘뭐 사먹으라’고 준 돈 5전과 모아두었던 돈 10전을 가지고 군위 집을 나선 장면이다. 10전을 주고, 10전어치인 10리를 차를 타고 간 것을 제외하면 김수환 소년이 무려 120리를 걸었던 셈이다.

 

아침에 군위에서 출발하여 해가 지기 전에 대구 시내의 누님 집에 도착했지만 책의 어디에도 그때 힘들었는지, 발이 부르텄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어디든 걸어 다니던 시절이라 해도 130리 길을 마을 가듯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다.

 

막내아들인 김 추기경이 그렇게 걸어갔다면 어머니나 누님이 힘들지 않았느냐, 아프지는 않느냐 걱정 한마디쯤 있었을 만한데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만큼 강했거나, 김 추기경 스스로 고생에 대한 내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남과 다툰 적 없어도 상대를 제압 할 마음·체력도 좋아

이런 체력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종교적인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보면 지나친 수사일까. 그럴만한 이야기가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을 자각하지 못할 때, 즉 영아기 때 폐렴으로 거의 죽음에 이른 적이 있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하는데 죽음에 이르러 주교님 앞에서 견진성사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죽어가는 나를 보며 죽어도 주교님께 데려가 견진성사를 받고 죽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는데요. 우리 집이 주교님 사시는 곳에서 가까워서 나를 안고 주교관에 가서 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도록 했는데, 그 성사의 은혜인지 다시 살아났어요.”

 

김 추기경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 성사의 은혜인지 다시 살아났어요’라는 몇 마디가 참으로 무겁게 와 닿는다. 당사자는 무심히 말하지만 듣는 입장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받은 몸이니 강한 체력을 가질 수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김 추기경이 편안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친 뒤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들어가 기숙사생활을 할 때의 얘기는 지금 들어도 여간 안쓰럽지 않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 의하면 “겨울이면 잠자리에 드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며 “너무 추워서 옷을 껴입은 채 곯아떨어지는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면 땀을 많이 흘려 이불이 흥건히 젖게 되는데, 다음날 낮에 그것을 뒤집어 널면 날씨가 추워서 그대로 얼어버렸다고 한다.

 

그런 날 밤 김수환 소년과 또래의 학생들이 얼음 같은 이불 속에서 얼마나 떨었을지 상상이 간다. 고생스러움을 감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혹독했던 것이 분명하다.


김 추기경은 자신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사춘기에 연애 감정이 전혀 없었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니냐는 듯이 가볍게 인정한다.

 

성직자이기 이전에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물으면 ‘나도 사람이다’라고 한다. 배고픔이나 고통 같은 면에서 결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백만인 걷기 운동에 참가한 김 추기경(왼쪽 두번 째, 1981).

 

“사람이니 사춘기에 연애감정 전혀 없었다면 이상한 것”

 

물론 그럼에도 그 삶의 역정이 결코 속되지 않았다. 일본 상지대(1913년에 예수회가 세운 학교)에 유학하던 시절, ‘신학생 신분이라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거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기회가 없었다’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김 추기경은 자신이 원해서 사제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뜻이었음을 얘기한다. 추기경으로서의 영광이라면 어머니에게 돌리겠다는 효심으로 읽힌다.


전통사회의 윤리와 가치 면에서도 김 추기경은 열린 정신의 소유자다. 가톨릭이 원래도 그렇지만, 오랜 전통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이것은 김 추기경이 정신적인 면에서 여유롭고 건강하라는 중요한 근거다. 그래서 “호가 있으십니까?”라고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해봤다.

 

가톨릭에서는 세레명을 쓰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호는 낯설다. ‘000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호는 남이 지어주는 것이라야 한다지요? 나는 남이 지어준 것은 없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김 추기경 스스로 지은 호는 하나 있다. 그것을 아직 공표한 적은 없으니 아직은 ‘오프더레코드’라며 알려주었다. 전통과 김 추기경의 가계력, 사회를 보살피는 따뜻한 마음을 함축하고 있는 좋은 뜻의 호였다.

 

전통에 대한 이런 열린 정신은 김 추기경 자신의 스트레스 부담을 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선교를 하는 성과까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유교적 전통에 따라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데 대해서 가톨릭이 비교적 관대한 것에 대해 “1930년대에 이미 교황청에서 그런 결정을 했어요”라며 겸양했다.

 

하지만 전통사상, 전통종교적인 입장의 사람들이 가톨릭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까닭은 김 추기경의 리더십 덕분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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