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금요칼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관리자
  • 승인 2011.09.02 13:15
  • 호수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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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란 한서대학교 노인복지학과 교수

한국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2010년 지역별 교통사고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들 중 31.8%가 65세 이상 노인이었다고 한다. 즉, 교통사고 사망자 3명 중 한 명이 노인인 셈으로, 세계 1위에 해당되는 불명예이기도 하다.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1%에 불과했는데, 교통사고 사망자 비율은 그 3배에 달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더군다나 노인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외출 빈도가 잦지 않고 자가 운전자 비율 역시 낮은 점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수치다.

노인들의 교통안전 문제는 벌써 여러 해 전부터 새로운 사회문제의 하나로 논의돼 오고 있다. 2006년부터 (사)한국생활안전연합은 현대기아차그룹 그리고 경찰청과 함께 ‘어르신이 안심하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고령사회 만들기 S·T·O·P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또 행정안전부를 비롯해 정부 및 각 지자체도 노인들의 보행안전을 위해 크고 작은 노력들을 기울여 오고 있다. 특히 ‘도로교통법’ 제 12조의 2항인 ‘노인 및 장애인 보호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근거한 노인 보호구역의 지정은 그런 노력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노인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을 살펴보면, 과속방지턱 하나 없거나 서행을 경고하는 점멸등이 없는 곳은 물론이고 심지어 보·차도를 구분하는 경계석이나 울타리조차 설치돼 있지 않은 곳도 있다.

게다가 아직까지 노인 보호구역에 대한 홍보도 미흡한 상태여서 운전자들 중에는 노인 보호구역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노인인구 비율이 높고 교통안전망이 미흡한 농촌지역의 경우에는 아예 보행도로가 따로 설치되지 않았거나 가로등이 없어 일몰 후에는 시야확보가 어려운 곳이 많다. ‘2010년 지역별 교통사고통계’에서 전국의 광역지자체 중 노인 사망자 비율이 40.2%로 가장 높은 곳이 전국에서 농촌 비율이 가장 높은 전라남도였다는 결과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과연 영화 제목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노인이 행복한 도시’니 ‘고령친화도시’니 하고 수선을 피우고 있지만 정작 노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조차도 확보돼 있지 못한 현실에서 이런 슬로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노인들이 안전하지 못한 곳에서 노인들이 어떻게 행복하고 친화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소한도 생명의 위협은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고령화 정책들은 모두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이미 국민 10명 중 1명 이상이 노인인데, 그들이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과연 지금의 우리 사회를 안전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슬러 생각해보면 현대화 과정 속에서 젊은 세대의 기준에 맞춰 우리 사회의 모든 것들이 재편됐고, 급기야 오늘날 노인들이 살아가기에는 위험하고 불편한 사회의 모습이 돼 버렸다.

버거울 만큼 높은 계단을 최소한 두 개는 올라서야 탈 수 있는 버스, 그보다 더 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지하철,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 전에 서둘러 건너야 하는 횡단보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계단을 따라 오르내려야만 필요한 일을 다 볼 수 있는 대다수의 건물들, 깨알 같은 글자로 전송돼 오는 휴대폰의 알림 문자들, 선착순으로 순식간에 등록하고 마감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 뜻은커녕 읽기조차 어려운 외국어 일색의 거리 간판과 표지들.

젊은이들의 기준에서는 아무런 불편을 못 느낄 수도 있는 이런 것들이 노인들의 입장에 서면 불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장애인이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의 시각에 맞춘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비단 주택설계나 용품의 디자인에만 적용되는 원칙은 아닐 것이다. 또한 ‘보편적’(universal)이라는 것을 노인이나 장애인에만 적합하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이 원리는 그들이 편안하고 적합하다고 느낀다면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은 전혀 혹은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탑승할 수 있는 버스나 지하철을 불편해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며, 보기에도 시원하게 큰 활자로 전송되는 문자서비스에 불편해 할 사람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도와 차도가 안전하게 구분된 도로환경이나 시야가 충분히 확보된 가로등, 선명하게 보이는 도로표지판, 조금 더 여유 있게 조정된 신호등 주기 등에 큰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니버설 디자인은 우리 사회 전체에 통용돼야 할 고령화 사회의 생활방식이라 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노인이 안전한 사회’가 바로 ‘우리 모두가 안전한 사회’이듯이, ‘노인을 위한 나라’란 결국 ‘틀림없이 언젠가는 노인이 될 우리 모두를 위한 나라’가 아닐까?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라는 시각과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과연 노인이라면 안전할까 한 번만 더 생각한다면 그런 사회, 그런 나라는 바로 우리 눈앞에 성큼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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