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간호사 공적 평가해야”
“파독 간호사 공적 평가해야”
  • 관리자
  • 승인 2011.10.28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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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간호사로 20년 활동한 하영순(68)씨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여자간호대학을 나온 하영순(68·여)씨는 1966년 23세의 나이에 독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960∼70년대에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대거 파견된 이른바 파독 간호사중 한 명이다. 4남4녀 중 7번째로 태어난 그는 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독립 선언과 함께 독일행을 선택했다.

그는 뒤셀도르프 대학병원을 시작으로 담스타트, 프랑크푸르트 등지의 병원에서 근무하며 1985년까지 20년간 환자를 돌봤다.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10월 27일까지 열리는 제1회 재외한인간호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하씨는 “밤을 새워가며 피고름을 닦아낸 대가로 받은 월급의 3분의 2는 꼬박꼬박 서울 집으로 보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첫 월급 480마르크(당시 한화 5만7000여원)를 받아 300마르크를 떼어 집에 보내기 시작해 결혼 전까지 서울의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을 송금했다”며 “1966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파송된 1만여명의 간호사는 나처럼 온갖 고생을 하며 번 돈을 고국에 송금했다”고 말했다.

하씨는 3년 임기가 끝나고 귀국하고 싶었지만 가족에게 선물을 사갈 돈이 없어 1년을 더 연장했다. 이는 그러나 고국과의 이별을 고하는 선택이 됐다. 같은 해 파독 광부로 한국을 떠난 남편 김현구(2005년 작고)씨를 만나 현지에 정착하게 된 것.

그는 남편이 광부를 그만두고 가톨릭교회 사무국장을 하면서 수입이 줄자 1남1녀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1979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맞은편에 ‘김(金)선물센터’를 차려 ‘투잡’에 나섰다.

간호사 일을 병행하며 ‘억척 아줌마’로 살던 그는 1985년 20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간호사직을 놓았다. 그리고 사업에 전념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한인 관광객과 주재원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가장 큰 규모의 가게로 키웠다.

2008년 재독한인상공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뒤에는 독일내 한인 1세와 2세들의 교류는 물론 한국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독일에 진출하는 데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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