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들 구한 어머니의 지혜
[기고] 아들 구한 어머니의 지혜
  • 관리자
  • 승인 2011.10.28 09:57
  • 호수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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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훈 제주시 중앙경로당 회장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구좌읍이란 작은 농촌마을이다. 해변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인정 많고 순진한 사람들이 많은,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평화로웠던 마을에 뜻하지 않은 공산 폭동사건이 발발하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4·3폭동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1~2년 전, 공산주의자들이 거점 확보를 위해 자행된 도발이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양민들이 공산 폭도들의 손에 희생됐고, 학교 건물이나 공공기관도 폭도들의 방화로 인해 잿더미로 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국군이나 경찰의 주둔을 막기 위해 이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폭동을 이해하기에는 철이 없었던 필자는 나이 열넷의 중학생이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폭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2m 높이의 겹단을 쌓고, 통나무로 만든 큰 문을 달았다. 밤이면 문을 꽁꽁 잠그고 수비막을 성의 담벼락 주변에 띄엄띄엄 지어 놓았다. 성문에도 수비막을 지어 보초를 세우고 폭도들의 습격을 막았다.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야간 수비막 경비를 중학생들이 맡기도 했다.

농촌마을인지라 무기라고는 죽창이나 철창이 고작이었다. 죽창이란 굵은 왕대나무를 2m 정도 잘라서 막대 끝을 날카롭게 꼬챙이를 만들어 놓은 것이고, 철창이란 쇠붙이를 달궈 창을 만들어 긴 막대 끝에 묶어 놓은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김녕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자취생활을 하며 고향을 오갔다. 식량이나 부식이 떨어지면 고향에 가서 가져와야 했다. 귀향하려면 자취 학생들이 마을별로 짝을 지어 김녕경찰지서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통행증을 받아 고향 학우 10여명과 같이 식량과 부식을 보급받기 위해 고향으로 가게 됐다. 밤이 되자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과 6남매 등 여덟 명의 식솔이 마당 한 가운데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자리(초석)을 깔고 누웠다. 여느 때와 같이 모기떼를 쫓기 위한 까끄라기 모닥불을 피워 놓고 평온하고 행복한 밤잠을 자고 있었다.

밤이 으슥할 무렵 갑자기 수군거리는 인기척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무섭고 소름이 끼쳐 눈을 딱 감고 자리에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그 사람들에게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4~5명의 무리 중 한 사람이 “산 손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토벌대에 의해 상당수 소탕당한 공산주의자들이 수가 적어지자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잡아가려고 민가에 나타났을 때 쓰는 은어가 ‘산 손님’이었다. 폭도 무리는 이 날도 젊은이들을 잡아가기 위해 우리 집에 침입한 것이었다.

‘산 손님’이란 소리를 듣는 순간 필자는 여지없이 ‘잡혀가는구나’ 생각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어디 봅시다”하며 어둠 속에서 우리 식구들을 한 명 한 명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필자를 보자 발로 머리를 툭 치며 “이놈 어디보자”라고 소리쳤다. 그 때 어머니가 어디서 그런 지혜가 생겼는지, “그 애는 말 못하는 벙어리요”라고 순간적으로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폭도가 다시 발로 머리를 툭툭 찼다. 필자는 벌떡 일어나 멋지게 벙어리 행세를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놈 벙어리 맞구만, 우리 그만 갑시다”하고 올레 밖으로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우리 가족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어머니는 “꾀라는 것이 순간 그것 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며 내 손을 꼬옥 쥐면서 “아이고, 내 새끼 넋 나갔지, 겁먹었지”하시며 품에 아들을 안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만약 필자가 그때 잡혀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고, 순순히 산사람들을 따라갔더라도 토벌대에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무서운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훌륭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멋진 지혜가 없었다면 벌써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이따금 고향에 들를 때마다 그 때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어머니께서 내려주신 벙어리가 아닌 벙어리가 된 그 순간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푸른 하늘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 하늘, 그리운 하늘.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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