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복의 새벽편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이태복의 새벽편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 이미정
  • 승인 2006.12.15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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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7일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에서 순국한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 누구도 이 날의 의미를 잊은 듯 그의 죽음을 추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 선생은 그렇게 잊혀져도 좋은 인물이 아니다. 물론 그의 완고한 위정척사 사상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설 수 없는 시대착오적 사상이었고, 의병투쟁 역시 명치유신 이래 근대국가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력에 대처하기에는 적절한 대응방식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면암 최익현 선생은 한말의 부패한 현실에 맞서 올곧은 선비로서 이를 바로 잡으려 애썼다. 당시 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재건공사와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폐해를 규탄해 관직을 박탈당했고, 제주도에 유배될 정도로 강직한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였던 것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압하자 일본제품의 불매운동과 납세거부에 이어 위정척사의 깃발을 들고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전쟁의 선봉에 섰다.

 

전북 태인에서 거병해 4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해 체포됐다. 일제는 면암 최익현 선생을 의병전쟁의 최고수령으로 지목해 서울로 압송하지 않고 멀리 바다 건너 대마도에 격리시켰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 일제가 주는 음식을 끝까지 거부해 죽음에 이르렀다.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한 채 유골이 돼 조국강산에 뿌려졌다.


1905년의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일제에 맞서 싸운 의병들은 유림이 선봉을 맡았으나 동학농민군의 잔류 병력이 많았고, 충청도 예산·홍성의 이남규 선생 부자는 일본 헌병의 칼에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등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죽어갔다.

 

이들의 의병정신이 이어져 2차 의병전쟁이 1907년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전국의 산하는 피로 물들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과 수당 이남규 선생 같은 한말의 지사들이 없었다면 조선조 500년의 역사는 부끄러운 기록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해 포로로 체포돼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위정척사라는 유교적인 세계를 고수했을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당시 개신유학자들처럼 면암 최익현 선생도 도도하게 밀려오는 서양 제국주 세력의 침략야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수구가 아니라 나라를 개혁해 근대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시급히 자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면암 선생이 유교주의자로서 대마도 포로생활 중 쓴 글 속에 이런 편린들이 남아 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힘에 짓밟히고 있는 조국의 현실과 대면했던 것이다.


흥사단의 YKA 산행길에서 만난 대마도의 날씨는 최익현 선생의 처절한 단식과 온몸으로 거부한 일제의 식민화의 몸부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따뜻했다. 밀수기지로 한 때 유명했던 이쯔하라 항구의 한 켠에 그의 순국을 기리는 추모 비석이 백년의 풍파를 견디며 외롭게 서 있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앞에서 50여명의 우리 일행들이 머리 숙여 추모할 때 어떤 감상들을 가졌을까  조선 최후의 선비 최익현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일제가 주는 음식은 한 톨도 먹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부한 선생의 의기(意氣)를 가슴깊이 사모했을까  아니면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의 기록을 잊은 듯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본 지도층의 우경화 흐름에 경각심을 가졌을까 

 

대마도에 남아있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정복 출항기지에서 바라본 한반도의 끝은 너무나 가까웠다. 거제도와 가거도, 부산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남겨두고 온 흥사단 대마도 산행의 귀국 배편은 무겁고 착잡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면암 최익현 선생(崔益鉉· 1833.12.5~1906.11.17)은 조선후기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해 관직을 삭탈 당한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았으나 순창에서 패해 쓰시마섬에 유배됐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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