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취임사로 본 역대 대통령들의 야심 (1)
[특별기획] 취임사로 본 역대 대통령들의 야심 (1)
  • 관리자
  • 승인 2006.12.2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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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굽어 보며 '나'라고 칭한 당당함

세계의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하면 우리는 압축적으로 민주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과 혁명, 군사정변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대체로 연착륙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들이 실수하고 다음 정권들의 격하 운동과 그때마다 동조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이 제왕적인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권력을 조금씩 해체하여 말 잘 듣는 공복(公僕)으로 조금씩 길들여온 면도 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 벽두에 대통령들의 권력에 대한 야심과 고분고분 국민에게 머리를 숙이는 장면을 역대 주요 취임사를 통해 알아본다. 

〈박병로 편집국장〉

 

우리 현대사의 고비 고비에 등장한 대통령들의 취임사에는 정권이 등장한 배경과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일면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자신에 대한 호칭.

 

우선 대통령 자신을 칭할 때 높여서 칭하는가, 낮춰서 칭하는가를 보자. 임금처럼 당당하게 ‘나’라고 하는가 하면, ‘본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머리를 숙여 ‘저’라고 낮춰 칭하기도 한다.

 

초대(1948년)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제9대(1978년) 대통령 취임 때까지는 대통령들이 자신을 호칭하면서 ‘나’라고 했다.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은 ‘본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 이후부터는 모두 자신을 낮춰 ‘저’라고 칭하고 있다. 대통령제를 시행한지 60여년이 되고 있어 이제는 대통령 스스로를 낮추는 말이 익숙하고 당연시되고 있지만,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나’라고 했다.

 

국민을 어루만지고 품에 안은 이승만 대통령의 ‘나’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나이가 70을 넘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국민적으로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어서 1948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 자신을 무엇이라고 호칭할 것인지 고민되었을 것 같다.

 

사실상 식민지상태가 된 1905년으로부터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정보는 조선왕실이나 일본 왕, 총독부 정도에 국한돼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초대 취임사를 성안한 작성자들은 민주적인 선각자였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임금이 자신을 칭하던 ‘짐’이라는 표현이나 일본 왕의 자신에 대한 호칭을 참고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점에서 깔끔하고 산뜻하게 선례를 남겼다.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다. ”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취임사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던 것이다. 첫 문장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 다음 단락은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운운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는 국부 소리를 들으며 국민적인 추앙을 받는 민족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느껴진다. 취임사 마무리 부분에서도 제왕적인 시선으로 국민을 위무하기도 한다.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마는 새 백성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난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3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 용진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지치고 힘든 온 나라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있는 듯한 것이다. 특히 ‘나의 사랑하는 3천만 남녀는…’운운한 대목은 옛날 성군(聖君)으로 칭송되던 임금이 내린 교지의 닫는 말 같이 들린다.

 

이것은 당시의 문어적 관습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통령 취임사를 남겼다는 것은 나라를 세운 초대 대통령으로서만이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행복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나’에 권력이 많이 실리지 못했던 윤보선 대통령

 

뒤를 이어 등장하는 윤보선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불행스러운 결과에서 얻은 교훈을 취임사에 밝히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처럼 자신을 ‘나’라고 칭하지만, 내각 수반에게 실권이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 의미가 그리 크다 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대통령 취임사에서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자유를 강조하는 부분이 눈에 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를 무서워했던 독재는 정녕코 물러났기에 오늘 우리의 정치활동은 자유로왔습니다’라는 부분과 후반부의 ‘정권의 잉여가치를 감소시켜 정권만능주의를 근절해야겠습니다’라고 하는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내각 수반에 집중된 권력에 대한 견제심리가 취임사에 은연 중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복자로 자기 영역을 선포하는 듯한 박정희 대통령의 ‘나’

 

박정희 대통령도 자신을 ‘나’라고 호칭했다. 그런데 5·16의 서슬 퍼런 권력의 힘과 뭔가 장중한 포부가 엿보인다. 첫머리를 보자.


‘단군 성조가 천혜의 이 강토 위에 국기를 닦으신 지 반만년, 연면히 이어 온 역사와 전통 위에 이제 새 공화국을 바로 세우면서,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 나의 신명을 조국과 민족 앞에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겨레가 쌓은 이 성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동포들이여!”라고 웅변조로 국민의 이름을 외친다. 마치 초원을 오래 떠돌던 백수의 제왕 사자가 무리의 지도자가 되어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며 사방에 대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이때의 취임사가 외국 어느 나라의 것을 모방했는지는 필자가 과문하여 모르지만 당시 상당한 문필가가 취임사 작업에 참여한 듯싶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시선과 흡사하게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동포들이여’라고 국민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도 이채롭다. 1917년생이니 대통령 취임 당시 박 대통령의 나이는 47세였다.

 

평균 수명이 짧은 시대였다 해도 47세 대통령으로서는 참으로 거침없는 취임사인 것이다. 총칼로 잡은 권력을 국민의 선거로 추인 받은 셈이고, 거기서 오는 자신감의 발로인지 모르지만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 혹은 나폴레옹 같은 야심에 찬 집권 포부가 엿보인다.

 

‘나’라는 호칭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제9대 대통령까지도 계속된다. 47세 때도 국민 앞에서 ‘나’라고 칭하면서 제왕처럼 군림했으니 50대가 지나고 60세를 넘겨서 자신을 낮춘다는 생각이 들었을 리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많은 미덕을 빛바래게 하는 오점으로 기록될 ‘10월 유신’을 통해 대통령이 된 뒤의 취임사를 보면 자신은 높아지면서 국민에 대한 요구는 많아진다. ‘나’라는 칭호 때문은 아니겠으나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통한의 실수를 한 셈이 되었고, 경제발전이라는 큰 치적이 있음에도 다음 정권들에 의해 부정되고 격하되었다.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전두환 장군이 권력을 잡은 뒤에도 박정희 정권의 미덕은 그다지 찬양되지 못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시대가 잘못됐음을 분명히 하고 사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까지 했다.

 

‘나’라고 칭한 대통령, 임기 못 채우고 물러나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대통령 스스로를 ‘나’라고 한 3명의 대통령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으로 중임을 하려고 했으나, 결국 임기를 마치지 못했고, 윤보선 대통령도 마치지 못했다. 역시 결과론적이지만 ‘나’라고 칭하지 않고 ‘본인’이나 ‘저’라고 칭한 대통령들은 최규하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기를 마쳤다.

 

호칭 징크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랜 장기독재 뒤에 최규하 정권이 들어섰다. 헌법상의 ‘대통령의 유고’ 상황이 발생했고 법에 따라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직무를 수행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979년 12월 6일,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그러고 6일 뒤에 익히 알려진 대로 12·12정변이 발생했다. 다시 며칠이 지난 12월 21일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을 하게 됐다. 10·26에서 12·12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가운데 취임을 하여 대대적인 행사가 되지도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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