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근로자, 근무환경·임금·근무시간 ‘최악’… 인권 차원 개선 시급
노인근로자, 근무환경·임금·근무시간 ‘최악’… 인권 차원 개선 시급
  • 안종호 기자
  • 승인 2012.12.21 15:14
  • 호수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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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노인이 해마다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2011년 실시한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노인의 약 34%가 일을 한다. 하지만 구직을 희망하는 노인은 아직 120만명이나 있다. 정부는 올해 노인일자리사업에 1672억원을 투입, 22만개 일자리를 창출했다지만 수요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민간기업 취업은 고사하고 월 20만원을 받는 공공부문 노인일자리마저도 쉽게 구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운 좋게 재취업에 성공해도 열악한 근무여건과 차별대우를 감내해야 한다. 단순노무직 위주의 비정규직 일자리, 적은 임금, 과다한 근로시간 등 불합리한 처우가 개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노동자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약한 노인근로자 근무실태와 문제점, 개선점들을 살펴본다.


▲ 인구고령화로 인해 구직을 희망하는 노인들이 꾸준히 늘고 있지만 노인근로자의 근무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이에 전문가들은 노인인권 보호차원에서 근로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올 7월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50세 이상 시니어 일자리 박람회’ 모습. 어르신 구직자들이 채용 게시대 앞에 북적이고 있다.
서울 강북구에서 6년째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길수(72·가명) 어르신. 2교대로 하루 12시간 일하고, 야간근무도 서지만 월급은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물가는 매년 오르고 있지만 임금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와 같은 수준이다. 무엇보다 1년짜리 계약을 반복하다보니 벌써 3번이나 근무지(아파트)를 옮겨야 했다. 용역업체나 아파트 주민들의 눈 밖에 날까 노심초사, 몸이 아플 때도 하소연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는다. 박씨는 “힘이 들어도 이 나이에 일할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는 취재진에게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면 다시는 일할 수 없을지 모르니 신분은 반드시 비밀로 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할 정도로 열악한 고용조건과 근무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노인근로자, 정규직 11.4% 불과
하루 12시간 근무, 단기계약 비정규직, 제한된 월급….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인근로자의 문제는 비단 박길수 어르신만의 일이 아니다. 정부가 1600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다양한 노인일자리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근무환경과 여건은 수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정규직, 단순 노무직에 국한된 열악한 근무환경은 물론, 노인근로자의 절반가량은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다. 물가 인상률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실질소득은 감소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6~8월 전국 65세 이상 노인근로자 511명을 대상으로 노인 고용현황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도 다르지 않다. 조사결과, 노인 근로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점은 ‘낮은 임금’(41.7%)이었다. 같은 일을 해도 젊은 사람들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기 때문이다. 이어 ‘고용불안’(17.6%), ‘긴 근로시간’(11.9%), ‘정년문제’(8.4%), ‘낮은 사회적 평가’(6.5%) 순이었다.

실제로 노인근로자의 절반 이상(51.3%)은 월 임금이 51만~100만원에 불과했다. 이는 정부가 정한 최저임금(95만7220원)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와 함께 산재처리, 근로계약 등의 복지·처우 개선도 시급한 상황이다. 노인근로자의 60.2%는 계약 기간이 1~2년에 불과했고, 70%는 사업장에서 근로계약을 연장하지 못하고 일을 그만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인근로자의 61.4%는 질병에 걸려도 사업주가 산업재해 처리를 해주지 않아 본인이 직접 치료비를 부담했다고 답했다.

이 같이 낮은 처우에 비해 주 평균 근로시간은 47.8시간으로 전체 근로자의 평균 근로시간(주 43시간)보다 더 길었다. 젊은 사람들보다 매주 4.8시간을 더 일하는 셈이다. 이는 야간 근무시간이 긴 경비업(21.3%), 청소(24.3) 등 단순노무직 근로자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규직 노인근로자는 11.4%에 불과했다.

이처럼 열악한 근무환경을 감내하면서 노인들이 일자리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노인근로자들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응답자의 84%가 임금을 생활비에 사용한다고 답했다. 일하는 주된 이유는 ‘생계비 마련’(59.1%)과 ‘노후준비’(20.5%)였다. 과거처럼 용돈이나 벌거나 여가활동에 사용한다고 답한 노인근로자는 7%에 머물렀다.

▲‘인권침해’ 심각한 노인근로자
노인취업의 질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노인들의 고용안정은 그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2010년 9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시장동향분석’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비정규직 비율은 76.5%에 달한다.

임금근로자의 연령별 사업체 규모를 살펴보면 열악한 고용환경은 더욱 두드러진다. 50~59세 노동자가 1~9인 미만의 영세업체에 종사하는 비율은 39.0%인 반면, 60세 이상 노동자는 55.5%에 이른다. 퇴직 후 얻게 되는 재취업 일자리는 대부분 영세업체의 단순노무직인 셈이다. 노인 집중취업 분야인 경비원, 보육도우미, 주차관리원, 건물환경관리원, 배달원, 주유원, 가사·간병·노인도우미, 농·어업숙련근로자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무엇보다 노인들은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보장되지 않고 있다. 노인근로자(월 205.8시간)가 25~34세 근로자(189.3시간)보다 월 15시간 이상 더 많이 일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연장·휴일·야간근무 시 주어지는 정당한 수당을 지급받지 못하는 현실이 더욱 문제가 된다.

인권위 실태조사를 주관한 유용식 세명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최근 고령 근로자의 대다수가 생계형 노동에 종사하지만 대개 장시간·저임금의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며 “직업 선택의 자유와 근로의 권리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단순 고용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장에서 노인근로자에 대한 인권침해가 빈번하지만 해고 등의 불이익을 우려, 정당한 권리 찾기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인권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노인근로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당국에 신고하기’(3.7%)보다는 ‘동료와 의논’(37.4%)하거나 ‘참는 경우’(29.2%)가 훨씬 많았다.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자리를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란 응답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해고나 재계약 중단 등 고용불안 때문’(64.4%)이 가장 많았고, ‘업무에 불이익이 있을까봐’(20.1%) 등이 뒤를 이었다.

유 교수는 “노인 근로자의 인권침해 사례를 줄이기 위해서는 경비근로자의 밤샘근로 문제와 건강권의 문제, 저임금 등에 대한 노동법적인 제도개선과 사회복지적인 정책적 배려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인 적합·유망직종 개발해야
차별받는 고령자의 노동권은 인생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선결과제 중 하나다. 2020년 초고령사회(65세 이상 노인인구 20% 이상)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 노인근로자들의 기본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대안마련이 시급하다.

노인근로자의 당면 현안을 인권차원에서 접근하려면 단순노무직 위주의 일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단기 재정지원 노인일자리사업은 취약계층 위주로 지속하되, 노인 맞춤형 일자리 개발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태현 상명여대 명예교수(前 여성정책연구원장)는 “월 20만원의 저임금 정부지원 노인일자리는 취약계층 위주로 지속하면서 고임금의 시장형·맞춤형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개발·보급하는 연계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와 공공기관, 공기업 등에서 임금피크제를 활성화하고, 민간부문에서는 연봉제 등 성과주의 보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이의준 중소기업청 국장은 “다가오는 초고령사회에서 노인인력은 중요한 경제활동인구이기 때문에 생산자로서 국가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공정한 근무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노인일자리의 질적 성장 방안으로 △노인 우선고용직종의 개선 △노인 적합·유망직종의 개발 △은퇴 교육, 재취업교육 강화 △‘경력활용’ ‘자립형’ ‘시장형’ 민간일자리 확보 △여성노인의 노동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 개발 등을 제시했다.

▲노인인권·노동법 교육기관 필요
노인근로자와 채용기업을 대상으로 한 인권·노동법 교육 및 모니터 사업의 필요성도 강조되고 있다. 인권위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노인근로자의 84.5%가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아도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고용불안’(64.4%)과 ‘업무불이익’(20.1%)을 염려해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다.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인근로자 인권 모니터 및 교육사업이 실시되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인권침해 사례가 쳇바퀴 돌 듯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인권위 관계자는 “노인인권 및 노동기본권에 대한 정보 부족이 열악한 노동조건을 스스로 방치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며 “노인근로자들에 대한 인권교육 및 노동법 교육을 연간 일정시간 의무화하고 인권교육과 노동법 교육을 전담할 수 있는 책임기관을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노인집중취업분야에 대한 근로감독을 강화해 정확한 인권피해 사례를 파악해야 한다”며 “분석을 토대로 노인근로자들의 업무배분과 임금책정의 공정성이 확보되도록 유도하고 선도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요구된다. 일본의 경우 ‘고령자고용안정법’에 근거해 기업에게 매년 고령자의 고용상황의 제출의무를 부과하고, 정부가 ‘고령자 고용상황’의 집계 결과를 매년 공표하고 있다. 이는 법 규정의 단계적 시행을 위한 모니터링제도의 효과를 확보하는 수단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종호 기자 joy@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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