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판 장악한 ‘어르신 이야기’의 힘… 주인공도 도맡아
연극판 장악한 ‘어르신 이야기’의 힘… 주인공도 도맡아
  • 이다솜 기자
  • 승인 2013.02.01 14:55
  • 호수 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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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노인 1만1542명을 대상으로 노인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어르신 99%는 여가활동으로 TV를 시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어르신들이 적극적인 문화 활동으로부터 얼마나 소외돼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판이 꾸준히 어르신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이는 노인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많은 관객들이 노인의 이야기가 담긴 연극을 선호하고 있다는 얘기다. 노인이 주인공을 분하는 연극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어르신 이야기와 인물들은 진귀한 경험을 통해 쌓은 지혜로 교훈을, 굴곡진 인생사로 가슴 찡한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연극판을 장악한 어르신 이야기와 캐릭터의 매력을 샅샅이 살펴본다.

▲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염쟁이 유씨, 노인과 바다, 늘근도둑 이야기, 손숙의 어머니.
‘염쟁이 유씨’ ‘노인과 바다’ ‘품바’ ‘손숙의 어머니’ ‘늘근도둑 이야기’ 등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2013년 연극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들 연극은 주인공이 어르신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각기 다른 유형으로 노인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그리고 있다.

먼저 어르신만이 갖고 있는 세월의 힘, 혜안과 연륜을 부각하고 있는 작품에는 ‘염쟁이 유씨’ ‘노인과 바다’ 등이 있다.

2월 28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공간 혜화에서 공연하는 ‘염쟁이 유씨’는 조상대대로 염을 업으로 삼아온 유씨(氏)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수습하며 배운 삶의 철학을 담고 있다. 연극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유씨의 경험을 통해 ‘잘 사는 삶’에 대해 탐색한다.
흔히 죽음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에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죽음을 삶의 당연한 과정으로 묘사,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7년 간 전국을 돌며 관객 30만 명을 돌파한 이 연극의 또 다른 매력은 배우 1명이 염쟁이 유씨, 조직폭력단 우두머리, 유씨의 아버지와 아들, 기자 등 15개의 배역을 소화하는 모노드라마라는 것. 임형택, 유순웅 등 탄탄한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배우들만 소화해낼 수 있는 역할이라는 평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염쟁이 유씨가 생애 마지막 염을 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이 비밀에는 묵직한 감동이 숨겨져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퓰리처상 수상 60주년 기념작 ‘노인과 바다’는 2월 28일까지 서울 대학로 해오름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주인공인 노인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장소다. 배 위에서는 거대한 물고기, 상어 떼와의 싸움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자신의 강인함을 확인한다. 때문에 노인은 배 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관객은 마음껏 웃다가 어떤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삶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또,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무대극으로 꾸며져 관객들이 망망대해 위의 노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든다.

연출가 김진만의 새로운 해석과 배우 정성희와 이동준의 노련한 연기도 호평 받고 있다.

그런가하면, 전 연령층이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대와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세대 간의 가교 역할을 하는 연극도 눈길을 끈다.

‘품바’ ‘손숙의 어머니’ 등은 조부모 또는 부모의 이야기를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구성해 공감대를 자아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함께 공연장을 찾기에 안성맞춤이다.

3월 31일까지 서울 대학로 상상아트홀 블루에서 공연되는 ‘품바’는 대한민국 대표 연극이다. 1981년 첫무대에 오른 뒤로 1993년 LA 한국일보 초청 미국 15개 도시 순회공연, 1993년 일본, 1997년 괌과 일본 등에서 해외공연도 펼친 바 있다. 2009년 6월에는 5000회 공연을 돌파하는 등 진기록도 세웠다.

이처럼 연극 ‘품바’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장 한국적인 색깔을 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20개 이상의 구전 민요와 각설이 타령, 익살스러운 우리 몸짓 등 우리의 전통과 드라마를 결합한 독특한 장르다.

100년 전 각설이 패 대장 천장근, 2012년의 어느 날 그가 후손 천동근의 삶에 나타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동근은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을 통해 6·25전쟁에서 아내를 잃고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할아버지의 일생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천동근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본지 355호 인물포커스에서 인터뷰 한 배우 손 숙의 50주년 기념작 ‘손숙의 어머니’도 2월 1일부터 2월 17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올해로 14주년을 맞는 ‘어머니’는 1999년 러시아의 극장에도 올라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한국의 정서가 보편성을 갖고 세계인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하는 이 연극은 남편의 바람기, 혹독한 시집살이, 자식의 죽음을 감내해야 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어머니를 열연하는 손 숙의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전개되는 입심과 유머감각, 가슴 절절한 연기를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공부를 하지 못하고, 첫사랑과의 헤어짐, 남편과의 억지 결혼, 불륜 속에 태어난 첫 아기, 남편의 바람기 등 개인적인 ‘살’(비극)은 징용간 첫사랑의 죽음, 분단, 전쟁 등과 같은 역사적 ‘살’로 확대된다. 이는 신주단지 풀어내기, 망자를 불러내는 초망자굿 등의 한풀이로 이어지고 어머니는 이승을 떠나게 된다.

왁자지껄 코믹한 대사와 에피소드 뒤에 오늘날 어르신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회한을 슬며시 드러내는 작품도 있다.

1989년 초연 이후 24년간 대중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는 사회의 부조리를 시원하게 꼬집는 대표적인 풍자극이다. 3월 3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한다.

수십 년 간 도둑질을 해 온 늘근도둑과 이제 막 도둑질의 세계에 입문한 덜늘근도둑이 만나 마지막 한 탕을 벌이기 위해 합심한 곳은 ‘그 분’의 미술관. 하지만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알 리 없는 도둑들은 오로지 금고에만 집착하다가 수사관에게 발각된다.

도둑 특유의 음침하고 악랄한 성격 대신 옆집 할아버지처럼 편안하게 묘사되는 두 주인공은 시종일관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결국 의지할 사람은 서로 뿐인 이들을 통해 노인들이 느끼는 외로움도 표현한다.

재밌고 어리바리하지만 허를 찌르는 도둑들의 대사는 촌철살인 그 자체다. “마늘은 왜 훔쳤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덜늘근도둑은 “인간이 되려고 그랬습니다”하고 답하는 식으로 크고 작은 웃음 포인트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다솜 기자 soyo@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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