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혼 일깨운 3·1운동 그 정신 영원하리…
민족의 혼 일깨운 3·1운동 그 정신 영원하리…
  • 이다솜 기자
  • 승인 2013.02.22 16:53
  • 호수 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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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3월 1일 서울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3·1독립만세운동 재현 체험'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 발표
도심서 전국으로 확대… 최대 규모 민족항일운동
前프랑스 식민지 모로코·베트남도 ‘열혈’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정오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같은 시각 시민과 학생들은 탑골 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1운동이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해 벌인 최대 규모의 항일독립운동 겸 민족운동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한 분노가 폭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의 ‘무단통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일삼은 것이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조차 탄압됐으며,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해 인권을 유린했다. 또,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경제적 수탈도 가했다.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됐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무단통치에 대한 적대감도 커졌다.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은 1910년대 국내외에서 활발히 지속됐던 항일민족운동을 토대로 마련됐다. 이 때 독립운동은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 종교단체·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 강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 등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이러한 항일운동을 기반으로 기미년 3월, 일본에 저항하는 민심이 한 곳에 모이게 된다.
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독일 등의 동맹국이 패전하면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기 시작한 시대적 배경도 중요한 계기가 됐다.
교통이 발달한 도시를 중심으로 수개월 간 지속된 3·1운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하는 인원, 계층이 늘어나면서 전국적으로 발전했다. 만주, 연해주, 도쿄 등 국외까지 항일독립운동의 열기는 확산됐다.
3·1운동의 과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점화기에는 서울 등의 주요 도시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돼 운동이 시작되며, 비폭력 투쟁을 학생들이 주도한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도시확산기에는 운동이 주요 도시로 확산됐으며, 상인과 노동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중순 이후의 농촌확산기에는 농민이 참여하며 폭력투쟁 양상으로 바뀐다.
이후 일본은 형식적이나마 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게 된다. 무력과 강압만으로는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판단, 한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고 공언한 것. 하지만 이는 우리 민족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막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다.
3·1운동은 항일운동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체가 없어 투쟁이 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독립청원 방식에 의존해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또, 민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애국심과 정치적 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의 5·4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외국 독립운동 사례
모로코
모로코는 1912년 3월의 페스조약에 의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됐으며, 9월에는 북부지방이 스페인의 영토가 됐다. 이에 반발, 1921년 북부지방에서 리프족이 반란을 일으켜 리프 제족 연합공화국이 탄생했다. 1925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대부대를 투입해 반란을 진압했지만, 그 이후에도 무장반란은 지속됐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1956년 3월 공동선언을 발표, 페스조약의 폐지와 모로코의 독립을 승인했다. 4월에는 스페인도 보호령 지배를 포기하고 북부지방을 되돌려주었기 때문에 모로코 왕국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베트남
껀브엉운동이 대표적인데, 이는 1885년 7월 베트남의 실권자 똔텃투옛이 어린 황제 함기를 데리고 궁중을 탈출해 광찌지방의 산간지대에 거점을 확보하고 의군을 조직, 프랑스 군대와 싸운 독립운동이다. 1883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맺은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888년 11월 함기 황제가 산지 소수민족의 밀고로 체포돼 알제리로 유배되자 저항운동은 구심점이 없어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판딘풍과 호앙호아탐은 그 후에도 장기간에 걸쳐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인도차이나
20세기 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독립을 달성하려는 민족운동이 시작됐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에 자극돼 1905~1906년 하노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1908년 베트남 중부 농민의 ‘단발항세운동’ 등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일본·프랑스의 타협과 프랑스의 탄압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중국의 쑨원 사상 등의 영향으로 애국지사들은 1908년 월남 광복회를 결성하고 민족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독립운동이 벌어졌으나 다음해인 1931년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되고 민족운동은 퇴조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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