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 초상화 그린 정형모 화백
역대 대통령 초상화 그린 정형모 화백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05.03 11:04
  • 호수 3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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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영정, 일주일 철야 끝에 그려냈죠”

 

▲ 비좁고 검소한 정형모 화백의 작업 공간. 낡은 화구에 둘러싸여 유명인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정 화백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 정형모 화백이 그린 역대 대통령 초상화. 왼쪽부터 전두환·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

이순신·권율 장군, 이병철 회장 등 기업인, 카터·부시 미국 대통령도 그려
‘스펙’ 없이 노력으로 ‘어진(御眞)화가’ 돼… ‘역사’ 그리는 자부심으로 살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자그마한 3층 건물 ‘정형모 미술아카데미’. 이곳이 우리나라 어진(御眞)화가 정형모(77) 화백의 작업실 겸 전시실이자 생활터전이다. 작업실은 미술 전공 학생의 그것보다 더 나을 게 없을 정도로 좁고 검소하다. 20평 전시실 벽면은 박정희·육영수 내외, 김수환 추기경, 교황 요한바오로 2세, 처칠 수상 등의 초상화로 가득하다. 지난 4월 말 어느 날, 정 화백은 작업실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초상화를 손보고 있었다. 그저 그려보는 거란다.

-대통령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전에 청와대 부속실이었던 세종실에 역대 대통령 초상화가 걸려 있어요.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화여대 미대학장을 지낸 김인승 교수가 그렸고, 그 뒤로 전두환·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제가 그렸어요.”

고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 당시 운구 행렬 맨 앞에 선 대형 영정(150호)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역시 정 화백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장 영정입니다. 문화재가 될 겁니다. 지금 현대미술관에 보관돼 있어요.”
정 화백은 1079년 10·26 다음날 오후 문공부로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 영정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순간 정 화백은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두려운 감정이 앞섰다. 그러나 4년 전인 1975년 8월, 고인을 청와대에서 직접 만났을 당시의 느낌-인간적이고 수줍은 듯하면서 상대방의 가슴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그대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철야 작업을 하며 영정을 완성했다.
정 화백은 우리나라 화가 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가장 많이 그렸다. 대통령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도 육 여사 인물화를 청와대에 기증하면서였다. 현재 이들 작품은 박근혜 대통령이 보관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리기가 어땠나.
“그 분은 머리숱이 적어서… 그게 처음부터 머리가 벗어진 건 아니니까 더 나았을 때를 생각하고 보기 좋게 그렸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그리기 전에 그 분을 몇 차례 만나 뵀지요. 신중하신 분이었어요. 그 분 초상화는 두 장을 그렸어요. 그림이 마음에 든다며 더 그려 달라고 했어요. 다른 하나는 김대중도서관에 걸렸어요.”

-눈·코·입 어느 부분이 어려웠나.
“인물을 세밀하게 분석하려면 한이 없어요. 전체적으로 풍기는 인품, 그것을 종합적으로 고민을 해야지요. (얼굴엔) 수시로 감정표현이 나타나고, 순간포착을 하더라도 인상이 전부 달라 종합적으로 그립니다. 그만큼 힘든 작업입니다.”

-세 분의 특징이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화통하고 여유가 있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중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실적이고 주관이 뚜렷했어요.”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청와대 오찬을 하거나 커피 마시는 정도의 만남의 시간을 갖고, 사진을 보고 그립니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립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3년 동안 그렸지만 미완성이라고 합니다. 사진도 수백 장을 찍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 얻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림은 말할 나위 없이 더 힘들지요.”

-세 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초상화는.
“그림 완성은 최대공약수니까 거기 도달하도록 작품마다 고민을 해요. 누군 잘 그렸고, 누군 잘 못 그렸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작품마다 혼신의 힘을 들여 완성하는 건데요. 초상화는 3위 일체가 돼야 합니다. 우선 본인이 마음에 들어야 하고, 제3자가 공감을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작가가 만족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닮아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닮지 않으면 가치가 없어요.”

-특별히 보너스를 받았는가.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바라서도 안 되지요. 대통령 초상화는 일종의 국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 최고통치자를 그리는 걸 영광스럽게 받아들이고, 의무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리는 게 작가의 태도입니다.”

-이순신 장군 영정은 어떻게 그렸나.
“문헌고증을 먼저 했어요.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이순신 장군 외모를 표현한 글이 나옵니다. ‘용모아칙(容貌雅飭) 여수근지사(如修謹之士)’라고요. 용모가 뛰어나 수양근신하는 선비와 같다는 뜻이지요. 이순신 장군은 잘 생겼어요.”

-장군 영정에 만족하나.
“작품에 만족은 없어요. 한이 없지요. 최대한 노력을 하는 겁니다.”
정 화백은 권율 장군 영정도 그렸다. 권 장군 영정은 행주산성 기념관에 있다. 국내 대통령뿐만 아니라 외국의 대통령도 화폭에 담았다. 미국의 카터·클린턴·부시 전 대통령, 처칠 수상 등. 기업 총수도 그렸다. 삼성 이병철·한진 조중훈·코오롱 이동찬 회장 등이다.

-기억에 남는 일화는.
“저 사진을 한 번 보세요. 저하고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이 함께 웃는 사진입니다. 부시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을 때 생긴 일이에요. 청와대 상춘재에서 부시 전 대통령 내외와 딸, 미 국무위원들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 내외와 비서관들이 오찬을 한 후 제가 그린 부시 전 대통령 초상화를 전달하게 됐어요. 부시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텍사스 목장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미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실린 것을 보고 그린 겁니다. 그런데 부시 전 대통령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만 초상화도 보지 않고 저를 와락 껴안는 겁니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라 어정쩡한 자세가 됐어요. 지금 생각해도 같이 껴안아주지 못한 게 영 어색하고 그러네요. 그렇지만 청와대 사진담당자가 저렇게 자연스런 순간을 찍어줘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처칠 수상의 초상화를 그려 영국대사관을 통해 본국으로 보내자 처칠 수상이 잘 받았다는 내용의 감사 편지를 비서관을 통해 보내온 일도 잊지 못할 일 중의 하나다.
정 화백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그의 성공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절친한 친구는 정 화백을 나무꾼 출신의 ‘어진화가’라고 말했다. 강릉 태생의 소년은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자랐다. 수원으로 옮겨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학창시절 그림과 글짓기는 늘 1, 2등을 차지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나무를 해다 새벽 장에 내다 팔았고 신문배달도 했다. 그 사이에도 미술연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상경해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미술품 코너에 걸린 초상화를 우연히 보고 화가가 되기를 결심했다. 일본 미술학교 출신 김종래 선생의 실습생으로 들어가 그림을 배운 후 3년 뒤 아현동에 화실을 차렸다. 학력이고 약력이고 내세울 게 없었지만 그림만 믿고 더러 제자들이 들었고 주문이 들었다. 차녀 진미씨는 “쌀을 봉지로 사다 먹었다. 점심을 거른 적도 많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림을 팔러다니셨다”고 기억했다. 정 화백은 “다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 정도의 고생은 누구나 다 했을 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학생도 가르치나.
“미술대학을 나와 전문 분야에서 수년 간 그림을 그린 이들입니다. 프로페셔널이지요. 제자 중에는 70대도 있어요.”

-화가 중에 장수한 이들이 많다.
“그림 그리는 동안은 행복해요. 자기 세계를 맘껏 작품에 담으니까 그 시간은 행복합니다. 아마 행복을 느끼니까 좀 장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모든 게 그래요. 인간이 욕심을 가지면 오래 못 견딥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작품도 되고 장수도 할 수 있어요. 노년에 취미로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고 싶어요. 비록 소질이 없더라도 취미가 있으면 돼요. 좋아하면 됩니다.”

-전시회는.
“인물화는 의뢰 제작이라 작가가 모을 수가 없어요. 개중에는 공개하는 걸 원하지 않는 이도 있고요. 서너 차례 했어요.”

정 화백은 벨라스케스나 고야 같은 궁중화가가 꿈이었다. 꿈을 현실로 이룬 지금,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무얼까.
“역사에 남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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