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의 만남 (1) ] 이상희 前 건교부·내무부 장관 ①
[명사와의 만남 (1) ] 이상희 前 건교부·내무부 장관 ①
  • 박병로 기자
  • 승인 2007.01.22 10:1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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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여건이 좀처럼 호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가 각박하다고 합니다. 이에 본지는 가슴 훈훈하고 희망과 의욕이 생겨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직 고위관료, 정치인, 성직자, 기업인, 학자, 전문가 등 각계 명사들로부터 들어보는 지면을 마련합니다.

 

명사들이 가슴에 묻어두고 말하지 못한 뒷이야기와 후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도 들어봅니다. 이번 호부터 이상희 전 장관을 연속해서 만나봅니다. 이 전 장관은 1932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했으며, 1961년 고시에 합격하여 정통 관료의 길로 들어서 진주시장, 대구시장, 산림청장, 경북도지사, 내무부장관 건교부장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어디서 만나는 것이 좋을까요 ”


인터뷰를 하기로 한 뒤 이상희 전 장관은 그렇게 물었다. 대구대학교 재단이사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는 현재 나가는 사무실이 없다.

 

그러니 집으로 오라고 하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언뜻 집에 초청하는 것을 꺼리는 듯하다는 느낌이 스쳤다. 장관을 지낸 우리 사회의 명사라는 점에서 의아스럽다.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하자, 이 장관은 가는 길을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무슨 수퍼가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어 어디서 오른쪽으로 꺾어들고, 미장원이 있는 데서 좌회전을 하며 얼마쯤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꺾이는 골목이 있는데 그 막다른 골목집이라고 했다.

 

아파트단지가 아니라 단독주택이라고 하여 필자는 성곽 같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큰 저택을 연상했다. 전직 장관을 3차례나 하고,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역임했으니 대 저택에서 산다 한들 무슨 흠결이 되겠는가.

 

그런데, 이 장관이 일러준 대로 길을 찾아 들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복작대는 상업지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 장관의 집이 있었다. 지정주차구획선이 그려진 좁은 골목길에 면한 짧은 골목길의 막다른 집이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초라하고 낡은 2층 양옥이었다.

 

대문 앞에 세워 놓은 승용차와 먼지털이를 들고 있는 운전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그곳이 이 장관의 집이라고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파트 생활 좋은 줄 모르는 신도시 건설의 주역

안으로 들어가자 작달막한 키의 이상희 장관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맞아주었다. 현관 입구에 책이 여러 무더기 쌓여 있어 공부 많이 하는 노학자의 집에 찾아온 듯했다. 이 장관의 안내를 받아 책 더미를 돌아 거실 한쪽, 자그마한 등나무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 둘러보니 요즘 25평형대 아파트보다 거실이 비좁았다.

 

물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이층에도 방이 있을 터이니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거실은 비좁고, 오래된 등나무 소파는 이 장관이 손님을 많이 친 것 같지 않아보였다.

여기서 필자는 따져보았다. 이 장관의 이 청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청빈한 전직 장관을 만나는 것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좋은 아파트에서 살지 않고 단독 주택에서 살고 있는 것이 의외라고 했더니, “평생을 단독주택에서만 살아왔습니다”라고 했다.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재산이 크게 불어나는 시대에 이 장관은 수없이 많은 도시 노인세대처럼 단독주택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장관을 역임한 명사로서의 의연함이라고 해야 할까. 지사적 선민의식으로 고지식했다고 할까. 시류를 읽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후회가 되거나 아쉽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나는 지금도 아파트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이사를 간다면 너른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하는 정도지요. 그러나 여자들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편한가 봅디다. 집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해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당도 변변하게 없는 집이었다.

 

스위스 레만호에서 일산 호수공원 조성 아이디어

그래서일까. 문득 이상희 장관에게서 강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청빈의 힘이라 할까. 아니면 신념대로 올바르게 살아온 국가 고위 관료로서의 자신감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 이렇게 굳건하게 살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이 장관은 우리 사회에 대해 바른 말을 하고 충고할 수 있는 자격과 발언권이 있다.

사실 그는 폭등하는 주택가격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경험이 있었다. ‘주택 200만호 건설’이라는, 당시로서는 꿈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노력할 때 그는 한국토지공사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토지공사 사장으로 신도시 개발계획을 주도하며 지금의 분당과 일산의 도시지형이 되도록 평면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또 자유로와 통일동산 건설에도 그는 심혈을 기울였다.

 

  일산 호수공원 전경. 이상회 전 장관은 공원을 깊이 파서 용궁이 있는 수중공원을 만들려 했다고 한다.

 

특히 신도시건설에서 유례가 없는 일산 호수공원은 그가 아니고서는 결코 조성될 수 없는 걸작이었다. 돈을 주고 매입한 땅 30만 평에 물을 끌어와 호수로 만든다는 것은 당시 누가 봐도 황당했으나, 그는 스위스의 레만호수를 모델로 하여 사업을 추진했다.

“지금도 아름답지만, 내가 생각한 것의 반밖에 안 됐어요. 난 거기에 지상낙원, 천당이 이런 것이구나 싶은 공원을 만들려고 했지요.”

 

고건 前 총리와 봉사활동 모임 한가람회 공동회장

 

이야기가 깊어지기 전에 잠깐, 이상희 장관이 누구인지 프로필을 짚고 넘어가자. 경북 성주 태생으로 고시에 합격한 내무부 정통 관료이며, ‘5공’ 시절 대구시장, 산림청장, 경북도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하고, 노태우대통령 시절 건교부장관을 역임했다.

 

성주출신에 이씨라는 점이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여사와 인척관계인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으나 그는 합천 이씨(현재 종친회장이다)다. 승승장구 장관직에까지 올라 혹 출신지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무부에는 전통이 있습니다. 사무관·주사들 사이에 이번에 누가 국장이 되고 시장, 차관이 되어야 한다는 공론이 돌아요. 그러면 대개 그대로 인사발령이 나지요. 성격이 강한 사람이 와서 그런 공론을 무시하고 어느 지역 일색으로 한다거나 하면 뒤탈이 나고 그러지요.”

이장관은 그러면서 고시 동기생인 고건 전 총리 얘기를 꺼냈다. 호남출신인 고건 전 국무총리는 이상희 장관보다 늘 한 계급씩 앞서갔다고 했다. 고건 전 총리를 직속상사로 모시고 근무한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

 

“고건 씨와는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며 “얼마 전 고건 씨와 한가람회 행사를 했더니 앞뒤 따져보지 않고 내가 고건 씨 캠프에 있는 것처럼 기사가 나갔더군요”라고 했다.

 

고건 전 총리와 내무부 초임시절부터 인연이 각별한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노선은 전혀 다르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근황을 물을 겸 한가람회가 어떤 모임인지 물어보았다. 대선 불출마 선언이 있기 전의 인터뷰였기 때문에 이 장관의 애기는 새겨들을 만하다.

 

“고건 전 총리와 내가 공동회장으로 있습니다”라며 “원래는 신형식씨라고, 전라도분인데 그분이 시작했었어요. 동서화합, 청소년보호, 불우이웃돕기 등 세 가지 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임이었지요.”

 

그런데 이 모임이 어느 날부터 운영이 미진해지자 고건 총리를 회장으로 영입하기로 했고, 고 총리가 고사하다가 이상희 장관과 공동회장을 한다는 조건으로 회장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나중에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박성룡 회장이 공동회장으로 참여하여 3두 회장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박 회장이 별세하여 지금은 2인 회장체제로 유지되고 있다.

 

일산 호수공원 “내 생각 절반 밖에 반영 못해” 아쉬움


“한가람회 구성원을 보면 친 고건 조직이 절대 될 수가 없어요. 한나라당 의원이 2명이나 있고, 경북도민회장도 있어요. 생각이 다른 의사, 대학교수, 방송국 아나운서…, 아니에요.”
이제 고 전 총리가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으니 이 장관과 호흡을 맞춰 한가람회 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것 같다.

다시 이상희 장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일산 호수공원 얘기를 꺼내자 이 장관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내 구상은 3가지였어요. 호수공원을 깊이 파서 용궁이 있는 수중공원을 만들고, 호수공원으로 이어지는 시내를 도연명의 무릉도원으로 조성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마지막이 창덕궁의 부용정을 본따 월영정을 짓는 것이었지요.”

이 장관의 이런 구상은 토공 사장을 그만두고 건교부 장관이 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계속>

 

박병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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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린 2017-06-03 17:32:41
지난날 공과는 영원하실 것입니다. 장관님!

석계린 2017-06-03 17:28:27
지난날 이루어 놓으신 공과는 영원 할 것입니다.

석계린 2017-06-03 17:28:23
지난날 이루어 놓으신 공과는 영원 할 것입니다.

석계린 2017-06-03 17:28:19
지난날 이루어 놓으신 공과는 영원 할 것입니다.

석계린 2017-06-03 17:28:13
지난날 이루어 놓으신 공과는 영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