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전통시장, 헌책방 골목도 풍요로운 여가의 밑천
맛집, 전통시장, 헌책방 골목도 풍요로운 여가의 밑천
  • 조종도 기자
  • 승인 2013.08.02 10:24
  • 호수 3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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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연구원 ‘국민행복시대의 여가와 국토’ 보고서

과거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타고난 근면 덕분에 전쟁의 폐허 더미 위에서‘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이만큼 경제를 일궜으니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눈을 돌리고 여가를 즐기는 데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20세기 초 네덜란드 역사학자 호이징가(1872~1945)는 인간을 가리켜‘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라 불렀다. 우리사회에 유행하는‘웰빙’‘힐링’‘행복’등의 키워드는 여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때마침 박근혜 정부는 국토를 여가자산으로 활용해 국민행복 시대를 여는 것을 중요한 국정과제 중 하나로 선정했다. 이런 가운데 국토연구원은 자체 발간하는 월간‘국토’7월호를 통해‘국민행복시대의 여가와 국토’특집을 냈다. 여가자산으로서 국토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여가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문화자산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방안을 탐색하고 있다.

 

▲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으로 나오는 보성여관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80년 된 일본식 여관이다. 소설에서는 빨치산 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의 숙소로 등장한다. 보성여관 전시실을 찾은 어린이들이 여관의 유래와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에 관한 설명을 읽고 있다.
▲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 그리고 보성군청은 2년에 걸쳐 보성여관을 보수공사한 뒤 2012년 6월 새롭게 개관했다.

벌교 보성여관 리모델링해 재개관… 도시 전체에 활력
닮은 꼴 도시문화는 식상… ‘다름’을 적극 부각시켜야
파리시의 바게트대회는 빵집·제빵사를 문화유산 승격


여가를 즐기려면 볼거리, 놀거리, 먹을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와 관련해 여가를 즐길 공간으로서의 국토는 매우 중요하다. 어디를 가든 비슷한 풍경과 음식뿐이라면 여가가 주는 행복감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의 여가를 강조하는 강동진 경성대 교수(도시공학)는 ‘대한민국의 도시나 농촌이 특색 없이 닮아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정표(里程標)를 보아야만 다른 도시에 온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은꼴이라는 것.
강 교수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기점으로 대규모 공동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어디를 가나 비슷한 모습이 형성됐다고 진단한다. 그는 “뭔가와 닮아간다는 것은 한쪽으로의 쏠림 현상이 심해진다는 얘기”라고 말한다. 쏠림은 ‘따라 하기’라는 병폐를 낳고 남의 것과 다른 내 것에 대한 재발견이나 남의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점차 사라지게 했다.
강 교수는 고급 예술 문화만이 아니라 현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일상의 삶 자체가 문화’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문화유산은 단순히 지나간 옛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잠재력을 가진 흔적과 기억들의 총칭이다.
시골에까지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서는 현상은 여가자산의 관점에서 아쉬운 모습이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매년 파리 시내 500여개 빵집들이 모여 바게트 경연대회를 연다. 이 대회에서 가장 맛있는 바게트를 만든 우승자에게는 4000유로(약 600만원)의 상금과 함께 1년 동안의 대통령궁 바게트 납품권과 장인의 칭호가 부여된다. 이는 동네의 작은 빵집들과 빵을 만드는 장인들도 문화유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강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이른바 ‘도시유산’이다. 도시유산은 문화재는 아니지만, 해당 도시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정체성을 지켜주는 대상들을 말한다. 오래된 맛집, 특별난 작은 가게들, 전통시장, 골목길, 동네 숲이나 당산목(마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나무) 등 소소한 자산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도시유산은 도시개발로 해체될 확률이 매우 높다.
김명수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를 ‘장소성의 회복’이라고 표현한다. 김 연구위원은 “장소성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인간과 공간의 관계, 공간과 공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현대사회에서 문화유산과 연결하여 여가를 향유하는 방법은 거닐거나 배우는 거다. 궁궐이나 정원, 역사마을을 거닐고, 그 속에서 무형의 전통문화를 배우고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여가 즐기기는 특정한 문화유산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강동진 교수는 “문화유산과 여가를 제대로 결합시키려면 ‘참여한다’ ‘누린다’ ‘체감한다’ ‘사랑한다’ ‘살아간다’ 등의 행위들이 문화유산과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 교수에 의하면, 사람들은 ‘다가선다→이해한다→들어간다→참여한다→즐긴다→체감한다→사랑한다→가꾼다→보호한다’ 등의 과정을 통해 여가를 즐기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려면 ‘거부감 없는 문화유산’과 ‘변화하는 문화유산’이 필수적이다. ‘거부감 없는 문화유산’이란 경직되고 값비싼 문화유산의 이미지를 벗은 것이다. ‘변화하는 문화유산’이란 생활의 변화와 의식 수준에 따라 유산도 변신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여가의 대상이 되는 문화유산의 유형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고 있는 동네나 지역 자체가 유산으로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서울 사간동길은 안국동~북촌을 연결하는 동네길인데 현대적인 스파게티집, 커피집, 갤러리 등과 오래된 기름집, 떡집, 목욕탕, 쌀가게가 공존한다.
도심을 걸으며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서울에선 북촌, 서촌 일원, 삼청동과 인사동 등이 꼽힌다. 또한 부산의 초량·영주·수정동 일원의 산복도로, 광복동과 남포동 일원, 경주의 노동·노서동 일원, 대구 읍성 일원, 광주의 양림동, 군산의 내항과 구도심, 목포 구도심, 강경, 통영 등도 유명하다.
60개의 헌책방들이 집결해 있는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이나 붉은 벽돌 건물이 모여 있는 대학로는 한 공간 안에 유사한 시설이 몰려있는 경우다.
기존의 오래된 시설을 리모델링해 여가 공간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북촌의 한옥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한옥과 서양의 음식문화가 어우러져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 문화유산으로 재탄생된 느낌을 준다.
리모델링을 통해 문화가치를 높인 사례로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벌교의 보성여관(소설에서는 남도여관)이 있다. 강 교수에 따르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지방 도시 벌교가 보성여관의 재개관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벌교에서 눈여겨볼 점은 보성여관만 리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1.3km에 이르는 벌교 읍내 길을 되살린 전략이다. 보성군은 보성여관을 ‘문화예술의 창작과 사회적 소통의 거점’이자 ‘벌교 지역문화 창출의 핵심공간’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수차례 증·개축으로 변형된 1층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갤러리와 카페로 만들고, 연회장으로 사용됐던 2층은 다다미방과 자료실 등으로 만들었다. 증축된 숙박공간은 보성여관을 찾는 탐방객들을 위한 민박 체험공간으로 활용한다. 또한 여관이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등장한 점에 착안해 작가들의 창작과 문화체험을 지원하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유산들을 주제에 따라 연결한다든지 다리, 입체화 장치, 테마 가로등 등을 통해 하나의 장소로 통합하는 일도 늘고 있다. 예컨대, 영국 런던은 세인트폴 성당과 테이트모던 미술관 사이를 가로막는 템스강을 밀레니엄 브리지로 연결해 새로운 문화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결국 여가자산에서 중요한 것은 차별성이다. 사회운동가이자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콥스는 ‘차별성은 보편성으로부터의 탈피에서 나온다’는 명제를 통해 오래된 것에 대한 관심은 차별성의 출발점이자 지역 발전의 초석이 될 수 있음을 예견한 바 있다.
강 교수는 “보편성에서의 탈피야말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자신만의 여가 즐기기를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면서 “오래된 것들을 최대한 남기고 다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도시 관리 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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