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 장광자(70)씨 "아직도 현역이에요”
제주 해녀 장광자(70)씨 "아직도 현역이에요”
  • 김용환 기자
  • 승인 2013.09.05 18:53
  • 호수 3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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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에 시작해서 55년간 ‘투 잡’

해녀들, 분만 전날까지도 물질… 갓난아기 고랑에 뉘어둔 채 밭일하기도
젊은 해녀들 ‘할망 바다’ 연로한 해녀들에게 양보… 존경의 표시이자 배려
“나이 일흔에 아쿠아리움서 공연 결정되자 시집가는 날처럼 가슴 설레”

 

 

 

온화한 기후와 천혜의 자연환경 등 제주도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이미지 뒤에는 제주 여성들의 모질고 억척스러운 환경에의 도전과 인고,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정신이 내재돼 있다.
외침과 중앙정부의 숱한 공납, 지방 관리의 극심한 횡포가 그들로 하여금 고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현실 개척의지가 바로 지금의 제주도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땅의 척박함은 바다로까지 삶의 공간을 연장하게 했다. 해녀들이 헤엄쳐 나가 물질을 하는 것을 곳물질이라고 하고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나가서 하는 작업을 뱃물질이라고 한다. 뱃물질을 할 때 부르던 해녀의 노래를 비롯해 맷돌·방아노래, 해녀 노래 등 여성 노동요가 남성 노동요의 4배 가까이 남아 있다.
그들은 바다에 생명을 걸고 있다. 해녀들은 보통 수심 10m에서 작업을 한다. 일단 물속에 잠기면 평균 30초 정도 머물지만 때로는 2분 남짓 견디기도 한다. 물질은 한 달 평균 15일 이상 작업할 수 있으며 제주 해녀들은 분만 전날까지도 물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전복, 소라, 해삼, 성게, 솜(말똥성게), 오분작, 문어, 미역 등을 주로 채취한다. 요즘은 서너 시간 동안 물질을 하면 5만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하지만 소라를 따는 날이면 30만~40만원씩 벌기도 한단다.
제주 해녀들은 썰물에는 물질, 밀물에는 밭일 등 평생을 투 잡을 하며 살아왔다. 제주 해녀의 작업장은 밭과 바다를 망라한다. 겸업률이 99%에 이른다. 바다에서의 물질 외에 예전에는 밭에 조, 보리, 밀, 감자 등을 심었다. 그러던 것이 밀감나무를 심고, 무·당근 등은 물론 유채꽃을 재배하기도 했다. 물질과 밭일을 마다 않는 제주 해녀의 초인적인 근면성은 제주의 자랑이기도 하다.
제주 해녀들은 연안에서 뿐 아니라 한 때는 일본, 중국, 러시아까지 진출해서 출가지 민가에 방을 얻고서, 3~6개월씩 물질을 했다. 해녀 장광자씨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대마도에 가서 3개월 정도 물질을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바다는 변화무쌍하며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깊은 바닷물 속에서 1~2분간 숨을 참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주해역에서 물질 중 숨진 해녀는 2010년 6명, 2011년 12명, 2012년 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3년간 숨진 23명의 해녀 중 70대 이상의 고령자가 17명으로 74%를 차지하고 있다. 고령화에 따른 체력 저하 때문에 고된 잠수작업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익사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나이든 해녀를 위한 얕은 바다를 ‘할망 바다’라고 부르는데 은퇴를 앞둔 연로한 해녀들에게 양보하고 젊은 해녀들은 깊은 바다로 나간다. 할망 바다는 선배 해녀에 대한 후배 해녀의 존경의 표시이자 배려이다.
해녀는 1965년 2만3081명으로 당시 제주도 전체 여성의 21.2%였으나 2012년 현재 4574명이다.
이들의 98.4%가 50대 이상이며, 직업의 대물림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
해녀 장광자씨는 “40여 년 전에는 고성, 신양 어촌계에 남자 30여명을 포함 400여명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남자 몇 명 끼어서 200여명으로 축소됐다”고 말한다.

 

 

 

▲ 60~70대 해녀들이 ‘아쿠아플라넷 제주’ 아쿠아리움에서 물질을 시연하고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 섭지코지로에 있는 ‘아쿠아플라넷 제주’ 아쿠아리움에서는 제주 전통해녀 물질 시연이 펼쳐진다. 8월 26일 공연을 한 김옥자(79), 강숙자(67) 해녀는 3층 깊이의 대형 수조 속에서 물질을 해 채취한 해산물을 들고 관람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무대매너까지 선보였다. 16명이 2인 1조씩 8개조로 나눠 교대로 공연을 하는데 출연 해녀들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해녀 지도자들이며, 물질 기술이 탁월하며, 성공한 사업가, 의사 등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갓난아기를 고랑에 뉘어두고 김을 매기도 했었다는 해녀 장씨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장남이 사업가로 성공했고, 차남이 동원참치 선장으로 활약하는 등 3남 1녀가 모두 잘됐다”며 “제주도가 살기 좋아진 것은 이제 겨우 30년밖에 안 됐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아쿠아리움 공연에 나가기로 결정된 후 시집가는 날처럼 마음이 설렜다”며 “나이 일흔이 됐는데 관객들 앞에서 제주 해녀의 물질을 선보인다는 것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15세, 빠른 이는 10세 때부터 물질을 시작하는 제주 해녀를 보며 제주 남성들은 술이나 퍼 마시고 빈둥거리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물질이 여성만의 몫이었던 것이 아니다. 전복을 따는 사내를 통칭하는 포작(飽作)이 있었고, 이를 제주에서는 ‘보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난 제주 남성들은 국가의 명령에 의하여 선박을 제조하고, 제주 주변의 해로를 개발하고, 이곳을 오가는 선박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 조정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의 인구는 점차 줄어들었고, 이 같은 정치적, 사회적인 환경 탓에 물질은 점차 해녀의 몫으로 변화했다.
심지어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집안의 남성이 군복무를 해야 하는데 병을 앓거나 노약자인 경우 그 집안의 젊고 건강한 여성이 대신 군역을 치러야 했다. 일종의 대체복무제로 여성군인을 여정(女丁)이라고 불렀다. 1600년대 초기에는 여정의 수가 남성 군인의 수를 웃돌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외국의 유수한 연구기관들에서 제주도 해녀들의 탁월한 잠수능력을 연구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으나 뚜렷한 신체적 특징 등을 발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그녀들의 잠수 능력은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감과 모성애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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