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자를 찾아서] 윤승원 씨(전북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효행자를 찾아서] 윤승원 씨(전북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 관리자
  • 승인 2007.02.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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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부터 장애 노모 모신 ‘소년가장’

우리 사회가 급속히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사회 보장시스템이 확충되고 있으나, 경제환경 변화에 따라 효문화도 바뀌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효행문화를 강요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생활문화에 맞는 효 개념의 재정립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에 본지는 현대인의 생활양식에 맞게 바뀌어가는 전국의 효자, 효부들을 만나 효행 사례들을 살펴봅니다.


아직 코흘리개인 10살 때부터 원폭피해자인 아버지와 다리를 잘 못쓰는 어머니, 그리고 어린 다섯 동생을 거느리고 부모님의 수발은 물론 농사일까지 도맡아 해오며 결혼도 마흔 살이 넘어 한 효자가 있어 화제다.


효행의 주인공은 전북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살고 있는 윤승원(71)씨. 윤씨는 아버지 윤석무씨와 어머니 김점순씨 사이에서 육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8살 때 아버지가 일본에 징용되어 끌려가면서부터 다리에 장애가 있는 어머니를 대신해 가정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윤씨는 해방이 되자 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으나 돌아온 아버지는 기대와 달리 원폭피해를 입은 불구의 몸이었다. 가사를 돌볼 마땅한 가장이 없자 그는 어른을 대신해 농사는 물론 집안 대소사까지 맡아하는 요즈음 말로 ‘소년가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6·25사변이 터지자 가뜩이나 치료 한 번 못 받았던 아버지가 피난살이 등 긴 고통 속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에도 윤씨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낮에는 농사일을 해야 했고 밤에는 가마니를 짜는 등 숨 한번 제대로 쉬고 허리 한번 펼 시간도 없는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윤씨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결혼도 미루다 마흔 살이 넘어서야 했다. 칠순이 넘은 그는 지금도 노모의 용변을 받아내고 외출도 시켜 드리는 등 60여년 동안 남들이 행할 수 없는 효도를 하고 있어 주위에 귀감이 되고 있다.


윤씨의 젊은 시절 이런 효행이 주위에 알려지자 급기야 김제군수가 그를 불러 효행을 칭송하며 무엇을 도와 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윤씨는 어머니가 생선을 좋아 하니까 강가로 이사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답변하자, 그의 한없는 효심에 감탄한 군수는 그를 김재군 청하면 새챙이 교량 감시 청원경찰로 특채, 1990년 정년퇴직 할 때까지 효도를 계속하게 하기도 했다.


윤승원씨는 “당시 난생처음 공직에 발을 들여 놓는 기쁨도 대단히 컸지만 이런 기쁨보다는 펄펄뛰는 싱싱한 생선을 수시로 잡아 어머니께 잡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기뻤다”고 회상했다.


윤씨의 효행이 지방 곳곳에 널리 알려져 지난해에는 현죽재단이 시상하는 ‘현죽효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를 잘 알고 있는 지역주민들은 한결같이 “윤씨는 천성이 곱고 근면해 부모에 대한 효도는 물론 형제끼리의 우애도 깊고 또한 직장에서도 모범을 보였다”며 “교량 감시 청원경찰 재직시 쉬는 시간에는 어민들의 고기잡이를 도와주고 주변을 청소하는 등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윤승원씨는 “아버지가 안 계시면 당연히 장남이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며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두성 기자 dslee@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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