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의 만남] 정원식 前 국무총리 ②
[명사와의 만남] 정원식 前 국무총리 ②
  • 관리자
  • 승인 2007.02.1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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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대사건으로 학생시위 가라앉히고 ‘남북 회담’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문교부 장관 시절의 전교조에 대한 우려를 아직도 다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문교부 장관 2년을 전교조와 전면전을 하다시피 하여 해산시켰으나 그의 뜻과는 달리 김대중 대통령 정부 때 합법화된 단체가 되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것을 사회적 정의로 여기고 있기도 하다.


누가 옳았느냐와는 상관없이, 정 총리의 전교조 활동에 대한 걱정이 기우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는 문교부 장관으로서 전교조에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런데 정원식 총리가 전교조에게만 타격을 가한 것이 아니었다. 기세등등하던 학생운동권도 그에 의해 물먹은 솜처럼 일거에 가라앉아 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외대 밀가루사건’이라고 알려진 그 사건의 여파가 어땠는지 후일 한 인터넷 신문이 정리한 기사를 보자.


“사건 당일 저녁 청량리 경찰서에는 수십 명의 외대생들이 계란 투척 여부에 관계없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외대생들은 일순간 ‘스승도 알아보지 못하는 패륜아’가 되어야 했다. 학생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도 싸늘하게 돌아서버렸다. 스승도 못 알아보는 학생들이 외치는 민주화 등의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정말로 그랬다. 토요일이면 서울 시내가 시위로 아수라장이 되었으나 그 때를 기해 거짓말처럼 수그러 들었다. 2주 뒤에 치러졌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도 민자당이 호남지역을 빼고는 압승했다. 학생시위와 노동운동에 대한 피로현상이 나타날 때가 되기도 했으나 그 때를 기해 도도하던 시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할 수 있다.

 

총리로서 외대에 강의를 나가게 된 경위를 들어보았다. 정 총리는 문교부 장관을 그만두고 잠시 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한 강좌를 맡아 강의를 했다. 그러던 중 5월 말경에 이르러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 가입을 놓고 남북간 표대결을 해야 하던 정부가 아프리카에 특사로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강의 중이었으나 정부의 이런 부름을 피할 수가 없어, 아프리카에 다녀온 뒤 보강하기로 하고 출국을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여 영어 능통자였다.

 

따라서 아프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나미비아, 나이지리아, 가나, 잠비아, 케냐 등 영어권 국가를 돌며 대한민국 지지를 호소했다.


“3주를 기한으로 도는데, 잠비아 오지에서 총리에 임명됐다고 빨리 들어오라는 거예요. 부랴부랴 귀국을 하느라고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니 벌써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더군요.”


한국에 들어온 정 총리는 곧바로 인준을 받았다. 그런데 외대 교육대학원 학생들과 보강하기로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그것이 고민이었다. 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정 총리로서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고 싶었지만 신분이 총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서와 숙의 끝에 학자로서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총리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외대에 가서 2시간 동안 보강겸 마지막 강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총리 관용 차를 안 타고 지하철로 갔다.


정 총리는 “한 시간 강의는 잘 했어요. 그런데 복도 밖이 와글와글 하더니 운동권 학생들이 밀려들어오는 거였어요”라며 “나한테 배우는 학생들은 대학원생들이었는데 이 친구들이 막지를 못하는 거예요”라고 했다.

 

또 “내가 운동권 학생들에게 붙들려도 속수무책이었어요. 강의실이 4층인데 학생들한테 붙들려 1층까지 끌려 내려갔습니다. 그때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조심했어요. 계단을 헛짚으면 넘어지고 안경이 벗겨져 깨질지도 모르니까요. 학생 둘이 내 팔짱을 끼고 내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운동권 학생 중에서도 나를 보호하려고 했던 학생이었더군요. ‘이러면 안 된다’ 하며 막는 그 두 사람 때문에 운동장에서 빙빙 돌리거나 하지 않고 교문 밖으로 내보낸 것 같아요. 밀가루에 계란으로 범벅돼 몰골은 이상해졌지만 그 바람에 교문 밖으로 바로 나가자마자 택시를 타고 공관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외대사건’의 전모다. 다친 데가 없어서 정 총리는 그 다음날 아침 출근을 했다. 기자들이 찾아와 기분이 어떠냐는 말에 그는 “마음이 아픈 것은 제자벌인 학생들한테 수난을 당한 것입니다. 내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에 대해 언론은 참으로 교육자적인 면모라고 대서특필했고, 일제히 정 총리를 동정하는 기사를 썼다. 인터넷 신문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칼럼이나 사설들까지 운동권 학생을 나무랐고 국민들의 학생운동권에 대한 시선도 싸늘하게 변했다.

 

정 총리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학생운동권은 옥상에 자살하려는 학생을 줄 세워 놓고 있었다고 한다. 6명째 죽었고 죽을 학생이 순서가 다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 총리의 ‘외대사건’으로 그 죽음이 중단되게 됐던 것.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없으나 당시 신문기사 중에는 ‘죽음의 잔치’를 중단하라는 칼럼도 있었다. 운동권적 시각에서 정리한 인터넷 기사에는 그 무렵에 죽은 학생들의 희생까지 묻혀 안타깝다고 했다.

 

정 총리는 “운동권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말도 듣지만 자살할 학생들을 구했다는 것도 나한테는 의미가 큽니다”라며 희생도 희생이지만 다음 희생을 막은 것에 의미부여를 했다.


결국 그로 인해 정국이 빠르게 안정됐고 총리로서 국정 수행도 원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무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정원식 총리는 남북문제에 모든 힘을 쏟는다. 문교장관 시절에 전교조와 씨름하느라 2년을 보낸 것처럼 정 총리는 “국무총리 2년을 남북문제로 씨름하며 보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필연이라고 해야 할까. 전교조를 해체하고, 학생운동권에 대한 시민의 우호적인 시선을 일거에 변화시켜 버린 사람으로서 자격이 있었던 것일까. 주사파에서 북한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한 운동권 일부에 큰 타격을 준 정 총리가 이제 대북한 회담에 나섰던 것이다.

 

   제5차 남북고위급 회담(1991)에 나선 정원식 前 총리(오른쪽).


남북 회담에서 정 총리가 이룬 최대 업적은 남북기본합의서. 이것은 물론 노태우 대통령의 치적이기도 한데, 남북간에 화해 불가침 교류에 대한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교류에는 특히 경제만이 아니라 인적인 면까지도 포함되도록 부속합의서도 만들었다. 군사, 정치, 경제합의서도 다 있었으나 북한의 핵 개발로 사실상 파탄이 났다.


“한번 회담을 할 때 보통 2~3일 걸려요. 그 회담을 준비하는 데만 두 달, 세 달 걸립니다. 우리쪽에 유리한 결론에 도달하게 하기 위해 리허설도 수차례 했지요. 연형묵 역할, 김병수 역할을 할 사람을 앉혀놓고 요구하고 주장하게 하여 그에 대응하는 연습을 한 것입니다. 그런 걸 8차례 했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그걸로 국무총리 2년 세월이 다 갔습니다.”


당시 남북회담에 임하는 북측에 진정성이 있었는지 묻자 “그럼요. 진심이었지요. 그때 동구가 다 무너졌지 않았습니까”라며 “국제적인 분위기가 그랬어요. 그들은 그것이 돌파구였어요. 우리가 소련과 수교하고 그러니 그네들 제일 걱정이 소위 흡수통일이었어요”라고 했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흡수통일에 대해 염려하는 바가 있다”라는 얘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정 총리는 “두 번 세 번 우리가 일방적으로 흡수통일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했지요. 우리는 화해다. 통일은 이야기도 안 했어요. 남북 대결을 화해 구도로 바꾸자고 했어요”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북회담에 나서는 그의 입장에 어떤 체제적인 우월의식이 있었을까. 속내야 있었을 터이지만, 회담에 임하는 내내 그런 의식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을 몇 차례 만났는데 그는 남한 대표로서 당당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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