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신라말~고려초기 한식성본 일반화
[한국의 성씨] 신라말~고려초기 한식성본 일반화
  • 관리자
  • 승인 2007.03.09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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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뿌리는 여러 갈래, 성씨·본관 토착 개념 아니다

고대사 연구가인 김성호씨는 ‘씨성으로 본 한일민족의 기원’에서 “단군은 할아버지 환인(桓因)과 아버지 환웅(桓雄)으로 이어지는 환씨였으며, 중국 문헌은 이 환씨가 한씨(韓氏)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고 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은 이와 맥을 같이하여 고조선사회가 실은 한씨조선이며 청주한씨가 그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한(馬韓 弁韓辰韓)과 대한민국의 국호로 봐도 한씨를 한국 최초의 성씨로 볼 근거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성씨와 본관 개념은 민족의 토착적 개념은 아니다. 성씨와 족보 연구가인 이수건씨는 “신라말에서 고려 초기에 한식(漢式) 성본이 일반화 됐다”고 한다.

 

그 근거로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진지왕 남산신성비 등을 꼽는다. 즉 7세기 이전 금석문에 중국식 인명을 쓴 기록이 없다는 것. 중국식 성씨가 정착한 것은 고려태조 왕건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토성분정’을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수건씨는 저서에서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 처음 나타난 우리민족의 성씨는 근초고왕(346~374) 여씨이고 고구려 장수왕(413~491) 때 고씨와 신라 진평왕 때의 김씨 등이다. 구당서(舊唐書)에 진평왕을 김진평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곧 676년에 삼국통일이 완료되면서 승자인 신라중심의 역사가 되고, 성씨의 시조 설화도 거기에서 탄생하여 발전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 등 신라 3성씨와 신라 이전의 6부를 구성하고 있던 李, 崔, 鄭, 孫, 裵, 薛 등 성씨, 그리고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왕 설화 등 우리나라 대성씨가 거의 신라 쪽에서 나와 확대재생산 되는 것도 그래서다.

 

백제와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진 뒤에 성씨 개념이 수입됐기 때문에 백제나 고구려계 성씨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성씨 시조설화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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