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안동권씨 성화보’ 체계 갖춘 첫 족보
[한국의 성씨] ‘안동권씨 성화보’ 체계 갖춘 첫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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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3.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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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씨 가정보’ 17세기 후반부터 명문가 족보의 표본

‘고려사’ 등 옛 문헌에 가첩 형식으로 집안 내력을 기록한 것이 있었으나 족보 체계를 갖춘 것은 성종7년(1476년)에 만들어진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첫 족보다.

 

이후 조선명종 20년(1565년)에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고, 17세기 후반부터는 이것이 명문가 족보의 표본이 됐다.


안동권씨와 문화유씨 등 초기 족보는 남자와 여자, 친손·외손의 구분이 없이 평등하게 기록됐으나, 17세기 후반 유교문화가 심화되면서 족보상에 큰 변화가 생겨난다.

 

17세기 이후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민중이 성장하고 천민층의 양민화와 신분질서의 해이현상이 나타난 것. 그리고 이때 가족제도가 변화되게 됨에 따라 호적이나 족보위조 등도 생겨났으며, 족보의 내용도 크게 달라졌다.

 

이때부터 전대의 족보와는 다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부계친손, 상내약외, 선남후녀로 보다 엄격한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적인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다. 이를 근거로 남녀평등주의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변질’ 됐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18세기 후반에 나오는 족보들은 위작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분상승과 양민화가 대거 이루어지는 시점이라 사료적 가치가 떨어질 정도로 위작, 과장이 많다. 특징이라면 시조가 신라 내지 고려조 왕실부마, 공신, 고관요직 역임, 명문출신, 고려조 때 ‘불사이군’ 원칙에 따라 공직에 나가지 않은 명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현재까지도 족보가 꾸준히 발간되고 있으며, 국립 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무려 1만3000여권(600여종)의 족보가 소장돼 있다.


한편 족보의 종류는 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의 씨족), 족보(族譜: 본관 단위), 세보(世譜: 한 종파), 파보(派譜:시조부터 종파의 이름과 벼슬, 업적), 가승보(家乘譜: 본인부터 시조 윗대와 업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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