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한·축의금·얼음조각 등 없는 5無 잔치
“돈보다 생명이 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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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생명이 소중”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3.12.20 09:59
  • 호수 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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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팔순잔치 겸 출판기념회
▲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팔순잔치에서 부인 강인숙 여사(건국대 명예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 나는 잘난 사람이 아니고 그저 그동안 즐거워서 열심히 산 것뿐인데 이렇게 챙겨주니 송구스럽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80)은 지난 12월15일 서울 중구 순화동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자신의 팔순잔치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이날 행사에는 고건 전 국무총리·김형오 전 국회의장·소설가 조정래·연극인 손숙·이길여 가천대 총장 등 문화예술계·학계 인사 600여명이 참석했다. 행사장 입구에 화환·축의금 접수·얼음조각 등 세 가지가 없었고, 행사 중에도 내빈 소개와 축사가 없었다. 이 전 장관과 동행했던 모든 이들이 똑같이 VIP이고, 오신 분이 다 중요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동건 전 KBS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잔치는 불가리아 파자르지크 시립오케스트라 앙상블의 공연으로 막이 올랐다. 전통의상연구가 이영희씨의 한복 패션쇼, 육완순무용원의 춤, 어린이합창단 ‘레인보우’의 동요, 안숙선 명창의 판소리, 안무가 국수호씨의 전통무,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사물놀이 순으로 2시간여 동안 이어졌다.
김 전 아나운서는 “이 전 장관 부친의 백수연 사회를 본 적이 있다. 이 전 장관의 백수연에도 사회를 보겠다”고 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곁에 모시며 헤아릴 수 없이 큰 세계를 지닌 분이란 걸 알았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산으로 치면 금강산에 비유할 수 있을까. 20년 뒤 백수잔치를 내가 주관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팔순을 맞은 소감에 대해 “내가 서른 넘어서까지 살 줄 몰랐다. 우리 시대에는 ‘천재병’이라는 게 있었다. 천재들이 대개 폐병 걸려 일찍 죽었다. 그런데 나는 서른이 됐는데도 안 죽었다. 그래서 ‘아, 내가 천재가 아니구나’ 했다. 이럴 바에는 장기 작전을 짜야겠다, 해서 나이 80을 기준으로 삼았다. 8자를 누이면 시작과 끝이 무한대로 통하는 뫼비우스 띠의 모양이니까 80을 영원으로 보기로 했다. 그 동안의 삶이 나 개인을 위한 삶이었다면 80 넘어선 내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것을 사회에 나누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이날 하객으로 참석한 김남조 시인은 이 전 장관에 대해 “이 전 장관은 집에 컴퓨터를 5대나 두고 본다고 했다. 창조적 두뇌도 있지만 그 시대 문명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섭렵하고 이용할 줄 아는 이다”라면서 30여년 전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30여년 전 일본을 같이 간 적이 있다. 그때 벌써 ‘전화를 손목에 찬다’는 말을 했는데 그게 지금의 핸드폰을 예감한 듯하다. 부재중자동응답기를 사러 전자시장 아키아바라에 동행했다. 그거 사가지고 와 집에 설치했더니 전화를 건 상대편이 자동응답기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전화를 끊더라면서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이는 모든 사물을 바라볼 줄 알며, 예감하기도 한다. 밤이 오기 전에 어둠을 예감하고, 새벽이 오기 전에 빛을 예감한다.”
이날 팔순잔치와 함께 이 전 장관의 신간 ‘생명이 자본이다’(마로니에북스) 출판기념회도 곁들였다. 이 전 장관은 책에서 한평생 품어왔던 ‘생명자본주의’(The Vita Capitalism)를 강조했다. 생명자본주의란 ‘리먼 쇼크’가 전 세계에 ‘금융 쓰나미’를 일으킨 2008년 이후 이 전 장관이 제창한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를 이룩한 이 시점에 새롭게 맞이해야 할 패러다임이 바로 이 ‘생명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병들고 노쇠하여 더 이상 혼자 걸을 수 없게 된 자본주의 문명을 다시 복원하기 위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생명’과 ‘사랑’이라고. 돈을 위한 돈에 의한 돈의 자본주의, 물질을 위한 물질에 의한 물질의 자본주의를 생명을 위한 생명에 의한 생명의 자본주의, 사랑을 위한 사랑에 의한 사랑의 자본주의로 탈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은 50년 전 신혼 단칸셋방 시절 어항 속 금붕어를 살려내던 체험을 얘기해주었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왔고 아내와 나는 급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어항 속에 물을 쏟았다. 입김 같은 수증기가 올라오면서 어항이 숨 쉬는 소리를 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나 했던 것인데 정말 금붕어들이 꿈틀거리더니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온 세상이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반짝이며 헤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금붕어의 어항이 그것들이 태어난 강물과 바다로 이어지면서 지구 크기의 생명권으로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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