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당황하셨어요”
“고객님 당황하셨어요”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4.01.24 10:55
  • 호수 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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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기자의 취재수첩

지난 11일, 중국의 유명 여배우 탕 웨이가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해 우리 돈 3680만원의 피해를 보았다는 뉴스를 듣고 아직도 보이스 피싱으로 돈 잃는 사람이 있구나 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기자도 최근에 인터넷 피싱 사기에 걸려들 뻔 했다. 지난 주말 오후 7시경,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들어가자 금융감독원 팝업창이 화면 중앙에 떴다. 금융사기예방서비스를 실시하니 거래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인인증서를 재인증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웬 재인증? 주말이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할 요량으로 팝업창을 없애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팝업창 어디에도 창을 닫는 표시가 없었다. 팝업창 안에 나열한 10여개 금융사 로고에만 마우스가 작동했다. ○○은행 로고를 누르자 낯익은 은행 홈페이지가 떴다. 공인인증센터를 누르고 본인확인 절차를 거치자 화면 전체에 ‘사용자추가본인확인’이라는 제목으로 휴대폰 번호·계좌번호·계좌 비밀번호·사용자 아이디·사용자 비밀번호·인증서 비밀번호·보안카드 일련번호 등 7~8가지 항목을 적는 난이 나타났다. 휴대폰 번호까지 적어넣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 창을 닫고 컴퓨터를 껐다. 이때까지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거래은행에 전화해 이 같은 사실을 얘기하고 ‘은행에서 공인인증서 재인증을 원하느냐’고 묻자 은행 여직원은 “그런 일 없습니다. 그래서 다 적으셨어요? 바로 그게 피싱 앱입니다. 그거 하시면 안됩니다”고 대답했다.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놀라운 건 팝업창과 ‘사용자추가본인확인’ 창이 조잡하지 않고 그럴싸했으며, 사이비은행 홈페이지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8비트부터 팬티엄Ⅳ까지 20여년 컴퓨터를 사용해온 기자도 속아 넘어갈 정도였으니 컴퓨터에 취약한 어르신들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님 당황하셨어요’라는 유행어를 낳은 TV 개그 프로그램의 ‘황해’편이 큰 인기다. 30대 남녀가 허름한 방, 낡은 책상에 앉아 전화 한 대로 보이스 피싱 현장을 연출하며 생뚱맞은 엇박자 대화로 웃음을 선사한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촌스런 개그우먼 이수지가 어수룩하게 생긴 개그맨 정찬민에게 “전화를 할 때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정찬민은 한 남성에게 전화를 걸어 조선족 말투로 “남동생이 사고를 당했으니 돈을 부쳐라”고 말한다. 이 남성이 “여동생밖에 없다”고 답하자, 놀란 정찬민은 자신이 더 당황했지만 상대에게 “선생님 당황하셨어요?”라며 묻는다. 이어 정찬민은 “남자처럼 생긴 여동생분이 사고를 당해 인천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하지만 상대는 “동생이 전주에 있다”고 맞받아쳤고, 또 한 번 당황한 정찬민은 “전주에 있는 인천병원”이라고 다급하게 얼버무린다. 또 정찬민은 상대가 “동생이 어디가 다쳤냐”고 묻자 “어딜 다쳐야 돈이 제일 많이 나오냐?”고 되물어 웃음을 자아낸다. 이에 상대는 보이스 피싱을 의심하고, 정찬민은 “선생님 제가 보여요?”라고 순순히 답한다.
단순히 웃고 넘어가자는 개그 프로이지만 어르신들에게 보이스 피싱에 대한 주의와 예방 학습의 효과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프로의 방범 역할을 인정받아 ‘황해’팀은 지난해 말 서울 마포경찰서로부터 보이스 피싱 근절 홍보대사로 위촉받기도 했다.
요즘 KB금융·롯데·농협카드 3사의 2000만명 개인정보가 무더기로 유출된 사고로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카드사들이 약속하는 2차 피해 보상은 피해 발생에 대한 원인 규명이 모호하고 그때 가서 또 말이 달라질 수 있어 신뢰가 가지 않는다. 유출된 개인신상정보가 사기단의 보이스 피싱에 악용된다고 상상하면 등골이 오싹하고 잠도 편히 못 잘 지경이다. 과연 방법은 없는가. 카드를 없애고 옛날처럼 현금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결제하는 대신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을 직접 방문하는 수밖에 없는가. 이래저래 어르신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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